몽골울루스의 칸국들: 주치 울루스
징기즈칸은 주치를 장자로 규정하였으나 그에게 혈통문제는 계속해서 문제화 되었다. 그가 실제로 징기즈칸의 자식인지에 대한 논쟁은 주치를 일찌감치 칸 울루스의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떼어놓았다. 주치는 우구데이와 혈통 문제로 크게 다투고 모욕을 당한 후 카안 울루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을 세우고 그곳을 통치한다.
주치의 아들 바투는 1230년대 서방원정을 지휘한다. 서방원정의 결과로 킵차크 초원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속령화 하였다. 우랄 산맥을 중앙에 둔 상태로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게 된 주치 울루스는 이후에 역사에서 킵차크 한국, 킵차크 칸국으로 불리게 된다.
주치 울루스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좌익은 주치의 맏아들인 오르다가 첫 칸을 맡았고 우익은 주치의 차남 바투가 통치하였다. 우익인 바투 울루스는 러시아의 도시들을 비롯하여 볼가강과 시르다리야 연변에 위치한 교역도시들을 지배하였기에 공납과 교역에서 막대한 재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다할 도시를 확보하지 못했던 좌익은 경제적으로 매우 빈약했고 정치적으로도 우익에 종속적인 위치에 속했다.
주치울루스는 남쪽에 위치한 훌레구 울루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캅카스 산맥을 경계로 산맥 이남의 훌레구 울루스와 군사적 마찰을 일으켰다.
또한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는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1267년 우익의 뭉케 테무르 칸이 즉위하였다. 그는 우구데이 가문의 카이두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우익의 뭉케 테무르칸이 사망한 뒤 즉위한 투데 뭉케가 이슬람에 본격적으로 경도되자 이에 반발을 느낀 제왕들은 그를 폐위하였다. 실권을 잡은 노카이라는 인물은 뭉케 테무르의 아들인 톡토아를 1287년 즉위 시켰다.. 그러나 톡토아는 노카이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톡토아는 1291년 노카이를 누르고 우익 전체를 통일하여 통치하였다.
톡토아의 뒤를 이은 9대 칸인 우즈벡 칸의 시대에 주치 울루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우즈벡 칸은 칸 울루스와 훌레구 울루스에 사신단을 자주 파견하고 정치 경제적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이때 우즈벡의 치세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흑사병과 계승분쟁으로 주치 울루스 또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10대 칸인 자니벡 치세에 호레즘 과 사라이 같은 지역이 흑사병에 의해 쇠퇴되었고 곧 아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베르디벡 또한 노루즈에게 살해되었다. 칸의 피살은 곧 대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던 와중 1377년 티무르의 후원을 받은 톡타미시가 좌익 울루스를 통일하고 1381년 좌우익 전체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차가다이 울루스에서 갈라져 나온 티무르제국이 주치 울루스를 적대하면서 상황은 나빠졌다. 티무르 제국은 1391년 톡타미시 칸을 적대하여 원정을 감행했고 1395년에는 아스트라한과 사라이를 파괴했다. 톡타미시 칸이 1395년 테레크에서 티무르에게 격파 당하면서 사실상 티무르에게 속주로 종속 당하였고 쇠퇴의 길을 걷다가 15세기 중반경 크림, 카쟌, 아스크라한 칸국등 3개의 지역정권으로 분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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