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이후의 내분과 카이두
징기즈 가문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은 주로 계승문제를 계기로 벌어졌으며 이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새로운 칸의 즉위였다. 그러나 5대 쿠빌라이 칸이 즉위한 이후에도 징기즈 가문 내에서의 권력투쟁은 그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쿠빌라이가 속한 톨루이 가문이 뭉케칸을 즉위시키면서 주치 가문의 사실상 쿠테타로 권력에 잡은것에 대한 우구데이와 차가다이 가문의 반발과 뭉케 집권이후 두 집안에 대한 숙청에 의한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또한 톨루이 가문 내에서 조차 불만이 생겨났다. 쿠빌라이가 집권하면서 뭉케와 아릭부케등 그의 형제 가문은 쿠빌라이가 집권한 것에 대해 탐탁치 않아했다. 이러한 칸에 대한 불만은 곧 세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쿠빌라이 칸이 즉위 이후 가장 먼저 칸에게 반기를 든 인물은 차가다이 가문의 바락이었다. 그는 차가다이 가문에 칸의 영향력을 높히려 쿠빌라이가 보낸 자신의 심복이었는데 곧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차가다이 가문을 이끌게된 바락은 카이두가 이끄는 우구데이 가문과 뭉케 테무르가 이끄는 주치가문과 함께 1269년 탈라스에서 쿠릴타이를 연다. 이 쿠릴타이에서는 트란스옥시아나 정주지대에 관한 지배권을 논의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쿠릴타이를 연것은 쿠빌라이 칸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이었다. 칸의 고유영역인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을 칸을 뺀 제왕끼리 해결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든 바락은 1270년 후라산 침공때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71년 사망하게 된다. 바락의 후라산 침공당시 연합을 약속했다가 약속을 깨고 귀환한 카이두는 바락의 사후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다.
우구데이 가문의 카이두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웠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1265년 자신의 아들인 노무칸을 북평왕에 봉하고 서북 몽골에 주둔시켜 둔전을 실시하고 이듬해인 71년에는 커지는 카이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알말릭에 진주시켜서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1276년 톨루이가문 뭉케 칸의 아들인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칸에게 불만을 품고있던 톨루이 가문의 제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시리기를 칸으로 추대한것이다. 이들은 쿠빌라이의 아들 노무칸을 붙잡아서 주치 울루스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의 부하이자 쿠빌라이의 심복 안동 또한 붙잡아 우구데이 울루스의 카이두에게 보내버렸다. 이들은 쿠빌라이의 아들과 심복 둘을 그들에게 보내서 두 가문의 지원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1282년 시리기의 반란은 쿠빌라이에게 진압되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톨구이 가문내 칸 울루스에서 내분을 종식시켰지만 칸의 서북 방위체제는 한 순간에 와해 되었다.
톨루이 가문이 내분에 휩싸인 사이 우구데이 가문의 카이두는 1285~86년 카라호초와 배쉬발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투르판 지역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은 카이두의 수중에 들어갔다. 카이두는 우구데이 가문 사람이지만 차가다이 가문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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