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5 족보
조선왕조실록은 집집마다 있을 필요가 없어요 . 족보는 종종 집에 있곤 합니다. 있긴 하짐나 실제 들춰본 경우는 없을 겁니다. 들춰본 경우도 어른의 도움을 받아야 내가 어디있는지 알수 있죠. 독학해서 보긴 어려워요.
족보 검색하면 우리나라 여러 문중의 나오는게 아니고 기존의 강의 모음집 이런게 나와요 . 족보라는게 여러세대에 걸쳐서 꾸준히 축적된 결과로 만들어진것이기 때문에 아마 여러 세대 항렬. 해 동안에 계속 세대에 걸쳐 전수되어가지고 그런의미에서 족보로 쓰이는게 아닌가 싶어요 . @ 족보의 정의 @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잘 알수있죠 공부안해도. 증조대로 가면 알수 잇나요 . 아버지에게 전해듣지 증조부가 살아있는경우는 매우 적죠 .증조부 이상 몇세대 이상의 조상을 알려면 전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증손주에게 알려주고 걔가 자식에게 알려주고 전승이 필요하고 그 전승이 누적된게 족보다. 여러세대에 이어서 만들어진 게 족보다.
족보상의 우리 공통조상은 누구인가 우리나라 족보의 화두인데 . 공통조상이라는 분들이 최초로 등장하는 김씨성의 최초의 조상. 김알지라던가. 김수로왕이라던가 . 또는 고려나 조선시대 어느시점에 벼슬살이를 해서 고귀한 사람들이 많이 공통조상이 되어있고 . 왕족이나 양반들의 자손이 대한민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수로왕이라던가 이런분들은 적어도 몇백만명에 달하는 자손을 두고 있고 . 5%의 조상이 50% 가까운 자손을 두고 있는 불균형이 있고 요 . 노비를 조상으로 두고있는살마은 거의 없다고 볼수 있다. 생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먼. 노비의 자손이 어느시점에 사라지지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족보가 있다는것은 돈을주고 사거나 . 환부역조 !! 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시점에 족보를 샀다는 사실 그래서 실제 역사의 그런 괴리가 생긴다 . 그리고 족보는 양반만의 족보라고 하지 않는다 . 양반중에는 장관이나 재상된 사람도 있고 . 시골에서 별볼일 없이 일반 백성으로 그친 살마도 있고 . 이사람은 성씨만 같을 뿐이다. 나랑 엮지마라 이런 풍류도 있는데 . 이렇게 하면 의미가 있겠는가 . 그래서 신분과 관계없이 다 올려주자 합니다. 문제는 신분이 떨어져도 올리긴 올리는데 이런 천한 일을 하면 실질적인 직업을 기록하지 않고 그냥 비워둔다. 백정 이라던가 농업이라던가 이런건 족보에 기록하지 않아요 . 과연 족보를 통해서 가족의 역사를 기록할수 있는가 . 그럼 뭘 기록하느냐 그러면은 벼슬살이 한걸 위주로 기록합니다. 현실적인 족보는 내가 양반이라는걸 드러낼수 있다는 사실만 올렸고 . 내가 양반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해선 내가 양반인게 제일 좋지만 . 그런사람은 굉장히 적으니까 .
현실적인 방법은 내 조상이 양반이었다는것을 드러내는것. 그래서 족보가 없는 평민들이 할아버지나 증조부만 알았을거고 할아버지가 살았다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만 알고 . 그러면은 자기 증조할아버지를 시조로 해서 족보를 만들면 되잖아 . 노비같은경우는 창씨를 해버리면 되잖아요 . 실제로 이렇게 하면 근본도 없고 쌍놈이다
라고 온천하에 선포하게 됨. 그래서 어떻게 든지 유명한 사람과 선조를 연결시킨다. 정씨중에 유명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다가 . 포은 정몽주라던가 이런사람을 자기 증조부와 이어붙여버려요 . 그래서 가짜 족보가 생기고 .
왜 이럴수밖에 없ㅇ었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고 .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이런 나의 조상들이 있는걸로 내가 출세할수 있다면 이런걸 신분제 사회라고 한다, 출생에 의해 모든게 결정되는 사회 . 양반이라고 하는게 어떤 기준인가라는 세습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수 있다 . 양반은 세습은 아니다 . 현직관리로 나아간걸 양반이라고 했지만. 곧 현직관리의 가족과 넓은 범위의 사람이 양반이 되었고 나중에는 관리로 나아갈수 있는 사람들을 그런 살마들을 넓은의미의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고 . 양반으로 나아갈수있는ㅅ사람을 통칭하게 되엇다 . 고려초기의 혁명적인 사건. 과거제 도입이죠 . 그전에는 혈통 좋은 사람드리 해먹었는데 . 고려시대부터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 시험을 가지고 사람을 뽑아도 . 현실적으로 정치권력에 나아갈수 있는사람은 한계가 있었다. 농사지으면서 과거 합격은 불가능했고 . 했다 하더라도 높은자리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 현실적으로 합격해서 높은자리에 올라가는 살마들은 나름대로 양반혈통의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양반이라고 하는게 족보가 있음으로 인해서 양반으로 써 사회적 지휘를 가지는 유용했다는거죠 . 족보라는게 어디까지 진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에 . 문제제기 를 해보는거구요 . 우리가 자세히 다룰수도 있을겁니다 . 또하나는 조선왕조 실록은 지금 만들지 않고있지 않죠. 고종순종실록은 쳐주지 않는다. 정통이 아님. 일제 식민통치기관이 만들었다 . 실록은 오늘날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도 전통이 끊어졌어요 . 오히려 이제 국가기록들이 조선시대 못하게 되었죠 . 통치자들이 퇴임하면서 후환을 막기위해 기록을 없애고 나가는 관행도 있었다죠 . 최근에 문제가 되고있죠 . 근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걸 편집해서 오년내지 기간에 정리된 역사책을 만들지는 않죠 . 전통이 끊어졌다고 할수 있죠
족보는 오늘날도 만들고 있습니다 . 계속 업데이트 되고 그 사람들은 여전히 나는 양반의 자손이라고 현대사회의 신분제가 철폐된 오늘날 까지도 양반의 자손이다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만들고 있습니다 . 그래서 족보가 오늘날의 문제가 있을수 있습니다 . 족보는 3가지 관점이 있는데 . 봉건의 잔재로 보는 관점. 남녀차별적 관점이 있다 . 남아 선호사상 이런거 . 남성위주의 가족의식을 심어주는 기록이다 . 가문의 전통이란 관점. 과거의 조상과 현대인의 연결고리라고 보는 관점이 있겠다 . 역사적 자료로 보는 자료 . 객관적으로 보겠다는 관점. 역사적 사료로써의 족보의 이용은 굉장히 조심스럽다 . 허위와 사실이 반반씩 섞여있다 . 족보는 이런 문제가 있는 족보는 한학기동안 다루어 보도록 할텐데요 족보의 정의를 내리고 진행하게쓰밍다
한 성관전체 그가운데 한 계파에 속하는 자손의 혈통과 혼인관계를 일정한 도표와 소식에 따라 기록한 기록이다.
성관이라는 말부터 . 성씨와 본관. 성씨는 이름앞에 붙이는 패밀리 네임이 성씨죠 . 본관은 안동김씨 대구서씨 이런거 . 본관은 우리가 이제 시조가 태어나거나 활동하거나 했던 출신지역을 본관이라고 하지요 . 본관은 몇세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아요 . 실제로 전주이씨의 이성계는 ㄴ4대조 이상까지 전라도에서 산적이 없습니다. 근데 전주이씨를 계속 쓰고 있쬬 .
전주이씨 경주이씨는 시조가 다릅니다 . 같은 이씨가 아니다라는걸 증명하는거죠 . 동성동본 금혼 이런게 있엇죠 . 조선왕실이 이씨잖아요 . 왕비들중에 이씨가 있나요 . 이씨성 가진 왕비가 업어요 . 고려때는 왕비중에 왕씨가 있어요 . 고려때는 왕씨끼리 결혼을 했는데 . 중국에 외교문서를 보낼때 왕비성씨를 쓰는데 중국에서는 동성혼을 하는게 금지되었기에 왕비의 성씨를 바꾸어서 그러느라 바뀌었다. 부인을 황보씨로 쓰게 하였다. 중국은 동성끼리면 어느순간 조상이 같다고 생각해서 . 동성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 왕비는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려야했기때문에 이씨는 피했고 . 후궁은 예외이다 .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영빈이씨. 영빈이씨는 후궁입니다 . 대외적으로 이름이 불릴 필요가 없어서 결혼을 한거죠 . 하여튼 성씨와 본관이 우리 가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본적 부호역활을 했습니다 . 일가라고 보아도 되고 한집안. 가문 전체를 . 또는 한 계파등을 지칭합니다 . 본관과 성씨. 파단위로써 족보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 덕수이씨 이순신과 율곡의 차이 .
혈통이라고 하는건 핏줄로 이어진것 혼인관계는 배우자 . 부인또는 남편. 단순히 이제 혈연이나 혼인관계를 쓴다고 족보가 되지는 않습니다 . 보라고 하는단어가 . 족보의 @글자의 으미 @ 보라는 단어는 일정한 서식에 따라서 쓴걸 보라고 합니다 , 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단순 나열한게 아니라 체계등에 의해 정리를 해야 보가 됩니다 . 그래서 사실만 기록한게 아니라 서식이 있어야한다. 이게 가계도 인대요 . 삼각형은 남자고 동그라미는 여잡니다 .
족보는 기본적으로 조상중심의 가계도 입니다 . 내가 중ㅅ미이 아니고 조상이 중심이야 . 족보의 시작은 한명의 조상에서 시작하고 시조 . 퍼스트 시죠 . 시조를 정점으로 해서 자손들을 쭉 기록을 하고있어요 . 이분이 아들이 몇이야 . 5남3녀죠 . 첫쨰아들이 2남1녀 ….. 이런식으로 . 이러다 보면 점점 사람이 늘어나겠죠 . 족보의 기본적 모양은 피라미드 모양이에요 . 하나의 종이에 그리면 엄청큰 종이가 필요해요 그래서 층층히 잘라서 책모양으로 만들죠 . 4세대에서는 다시 첫째 아들이 손자가 2남을 두고 …..딸로부터는 자손이 이어져요>?? 이게 주목할점인데요. 외손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 외손과 친손자의 차이는 성이 다르죠 . 성은 아버지성을 따르죠 . 딸은 자기의 성씨를 자기 자식에게 주지 못합니다 . 성씨가 다른 외손들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 조선시대에 아들을 두지 못한사람은 양자를 들입니다 . 양자를 들이는데 . 반드시 원칙이 있습니다 . 성씨가 같아야하고 . 조카항렬을 받아야 합니다 . 내 동생을 양자로 받는건 안된다 . 조카도 반드시 남동생의 조카를 양자로 받아야한다 . 성씨가 다르면 가계계승 이 안된다 .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딸만 낳으면 양자를 들여서 잇는다. 양자로 잇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양자를들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 족보에 대한 특성들이 드러난 정의를을 쓰게 씁니다 .
혈통과 혼인에 대한 기록이다
자기의 혈통을 밝히기 위해서 한 기록인대 . 혈통을 밝힌다는게 양반집안의 자손이라는걸 자랑하는 기득권을 자랑하는게 아니라 . 조상을 숭배하는게 유교잖아요 . 조상을 존중하는 존조라고 . 친척들은 한핏줄이기 때문에 이런 화기애애한 대가족을 이루자 이런차원에서 족보가 만들어지는데요 . 양반이라고 입증하기위해 만드는것은 나중에 좀 타락한 모습이고 . 사실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 자기 혈통을 밝히기 위한 기록이고 . 같은 조상의 자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것이고 . 족보가 업으면 어떠냐면 족보가 만들어진게 조선 초기라고 말씀드렸죠
고려시대에는 족보가 업었고 1493년 조선 성종때쯤 지배층 양반 지배층만 족보가 있엇고 . 선구적인 사람들이 족보를 족므씩 만들던 시기이고 . 이당시 조상에 대한 인식은 성중성이란 살마이 사촌형네 집에가서 성동조네 집에가서 물어보니 우리 조상을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알겠는데 모르겠다. 그래서 그 동생네로가서 순조네가서 물어보니 . 이사람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고 한거죠 . 이사람들이 고조 5대조 할아버지 . 아는건데 이 당시에는 많이 아는거지만 조선과 비교해서는 미흡하죠 . 족보가 없으면 이정도만 알수 있다는거죠 . 조상을 존중한다는건데 족보가 이써야 제사를 지낼수가 있고요 . 조상을 숭배하는 의례가 발달을 헀어요 . 제사문화가 족보를 통해서 .
친족집단의 기록이다 . 성관 성씨와 본관 같은 이런 동성동본들 동족이라고 했는데 동족은 문중하고 비슷한 말인데
조상을 같이하는 집단을 동족이라고 합니다 . 문중을 위한 기록이다 . 내 개인을 위한게 아니라 . 친족집단 즉 공동체를위한 전체의 기록이다라는거죠 . 문중이라는게 애매할수 있는데 . 선상같은데에서 그거를 문중소유의 땅. 문중을 법인으로 만들어서 등기를 하면 좋은데 자손중에 대표자 이름으로 등기를 해주고 공유물로 관리를 하면 분쟁이 생기기도 하는데 . 문중이라는게 하나의 조직이라는 겁니다 .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 개인이 속하는 동족 씨족의 기록이다 . 씨족은 원시적 공동체를 가르키는 말이고 . 조선시대는 씨족이나 동족이라는 말을 같이 쓴다 . 성씨를 같이 쓴다는 말의 씨족도 쓴다 .족보의 중요특성중 하나가 부계중심이라는거죠 . 성과 본관이 같은 남계친족 . 딸로 이어지는 친족은 딸은 기본적으로 문종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 출가외인이라는 말이져 . 시집가면 남편집안의 구성원이지 .딸은 열이 있어도 남의 집으로 가기 땜누에 나는 이을 자식이 없져 . 이게 조선시대 가계계승 의식입니다 . 남계친족의 특징은 성씨가 같다는거죠 . 이게 중요합니다 . 이런 유교적인 가족문화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것은 17세기 이후입니다 1516세기는중국의 성씨문화 겉모습만 받아들였지 내면까지는 아니였어요 . 성씨라던가 동성이라던가 부계라던가 . 이런것들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외가 친가가 동등한거에요 . 어릴때는 외가가 왜 크냐면 . 결혼풍습이 남귀여가혼 이였거든요 . 장가간다는 장가가 친정집일나느 소리에요 . 이후에 17세기에 시집살이가 됩니다 . 조선전기는 실절적으로 처가에 가서 생활을 했따 그게 보편적이었고 어렸을때는 외조부 곁에서 크는게 많았다 . 남자로 이어지는 혈통하고 여자혈통 동등하게 기록하는게 조선초에 많습니다
세대별로 기록을 하는건데 족볼보면은 이해가 될겁니다 . 족보라는게 반으로 짜여져 있어서 1세대 2세대 ….
그다음에 한세대씩 내려가는 방법으로 만들고요 . 가승이라는건 개인적인 족보에요 나와 직접 관계있는 조상을 직계조상을 정리한게 가승 가첩이라고하는데 . 더큰 개념이 족보라는거다 . 이런거는 세대별 구분이라던가 . 일목요연하게 볼수있는 도표와 서식을 갖추면 그것이 바로 족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 .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라고 부릅니다 . 안동권씨 는 성관이고 성화라고 하는것은 당시의 중국 명나라의 황제의 연호입니다 .
족보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 최초의 목판본 족보라는겁니다.활자인쇄와 목판인쇄가 있었어요 .
목판인쇄를 했다는것은 대량으로 찍어서 보급을 했다는겁니다 . 같은 문중의 자손들이 공유를 했다는거죠 .
실질적인 족보. 친족집단의 기록이라는 증거로 대량보급이라는거죠 . 다른나라에도 없다 잘해야 베트남.
일본도 사실 우리가 말하는 정의에 부합되는 족보는 없습니다 . 조상과 자손을 다루는 기록은 있어요 . 가계기록은 서양에도 있어요 . 전세계적으로 있다고 봐도 되는데 . 족보를 넓은 의미로 하면 족보의 종류가 다양해질수 있는거죠 . 가첩이라고 하면 소규모 족보 인데 . 개인의 가계기록을 개인적인 기록인데 가 첩. 이 족도는 데이터가 별로 없는거에요 . 엘지 회장의 아들 누구 며느리 누구 이런게 족도에요 . 데이터 양이 적고 도표식으로 가계만 적은거고 한장짜리 그림에 그리는경우도 있고 . 족보의 기초작업 문서로 보시면 됩니다 . 넓은 으미로 이런것들은 족보이고 족보를 만들수있는 기초 자료 였다 라고 이야기 가능. 족보는 역사서이기도 하고 아니가도 하다 . 족보를 이제 굉장히 미화하는 입장에서는 실록이 있든 집안에는 족보가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 족보는 액면그대로 믿으면 안되고 족보는 주의를 기울여 봐야하기때문에 ㅇㅇ 한학기동안 공부합니다 . 족보의 이름은 족보 보다는 세보라고 치면 많이 나온다. 책제목에다가 주로 쓴다 . 종보라는 말은 조상이같은 사람들이 집단이라고해서 존중. 문중이라고 하는데 문중의 기록이다 라고 씁니다 . 종보는 중국에서 주로 쓰는 용어입니다 . 성보라는 말은 중국에서 필요 없는데 같은성씨의 족보라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당연히 성씨족보이기 때문에 그렇고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권씨보다 권씨 아닌살마이 더 많스니다 외손까지 다 기록을 해서 그래여 . 우리나라는 성보가 아닌게 많아요 . 가승은 가첩과 동등한 말인데 . 조상으로 부터 나까지 직계조상을 뽑아서 가승을 만들곤 합니다 .
서와 발이있습니다 . 서는 뭐죠 서 ? 무인년에 만들어진 서문 . 무인서문. 임오보서. 한문으로 되어있져 . 한글이 섞이 ㄴ이유는 연도를 보면 현대에 올수록 한글로 쓴다 . 보통 한세대는 30년으로 해서 족보를 만듭니다 .
고려시대는 유명한 사람인데 묘소가 없기도 합니다 . 윤관의 묘소도 조선내내 모르다가 영조때에 발견이 된다 . 그이 유중에 하나가 고려시대에는 무덤을 열심히 수호하려고 안했따는 이야기가 됩니다 . 조선시대만큼 고려시대는 조상에 관한 의식이 없어요 . 무엇보다 고려시대는 종교적인 생활을 불교위주로 해서 . 죽은사람을 열심히 안모심. 극락왕생후 별로 신경안씀. 49재 이후 저세상으로 가는걸로 하는데 조선은 유교는 사후세계 가 없다 . 천국 이런게 없어서 자손이 계속 먹여살려줘야 하는거에요. 그게 제사 . 제사를 매년 ㅎ야하는게 어디 가는곳이 없어서 그렇다. 그말은 뭐냐면 유교에서는 무덤이 죽은 육신이 깃들엇기에 무덤을 계속 관리해야하는거에요 그래서 무덤을 그리고 산을 그려놓습니다 . 풍수지리. 명당자리가 있고 명당을 차지해야 자손들이 잘된다 . 하는 생각을 굉장히 품고 있었습니다 . 이게 바로 묘산도라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묘산도 .
개량한 족보에요 . 한글로 친절하게 한글을 한자 병기한겁니다 . 이 족보를 만들기한 규칙입니다. 생년월인은 왕ㅇ조연대를 쓰고 이런식으로 규칙 . 집단의 기록이기 때문에 규칙에따라 정리 항렬표 인데 항렬은 같은 세대를 다른말로 항렬이라고 합니다 . 항렬표를 만드는 이유는 항렬자 때문에 . 돌림자의 규칙은 병자속에 1자가 들어있게 숨긴다 ㅋㅋㅋ.특수한 경우고 수토목금화 이거 돌려가면서 쓰기도 한다.오행 사용 .세대가 내려가면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 내포 ,
조선시대 족보는 무조건 아들이 앞으로 갑니다 . 기록이 많은분때문에 족보에는 여백이 많은게 특징이다 . 아버지는 바로 위에 있다 바로 밑에가 아들 둘째아들 셋째아들 이런식 . 종이낭비가 심하다 . 과거기록은 교차검증이 되요. 지금 기록이 남아있고 검색이 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아무벼슬도 안하고 기록할게 없는사람은 학생이라고 부름니다 .
0322
본관에 관해서 정리를 하다보니 양이 만다. 그리고 사료를 제시해서 양이 많이염
성씨와 본관의 개념인데. 성씨는 한글자 내지 두글자 . 앞에쓰는 첫글자가 성씨인데 . 성씨란 사람이 속한 가족 가문을 으미하는데요 우리나라 성씨라고 . 토성이라고 하고 . 근데 서양과 외국 성씨와 개념이 좀 달라요 . 우리나라의 성씨는 부계 성씨입니다 .현행법은 바뀌었어. 자녀의 성을 새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걸 원래는 못해써오. 서양의 경우나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요. 성이라는게 말그대로 패밀리 잖아요. 가족구성원내에서 다른 성씨가 있따는게 말이 안되죠 . 어머니가 재혼을 한경우에는 새 아버지의 성을 가지기 때문에 놀란의 여지가 없ㅇ습니다 . 그걸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게 . 우리는 부부간의 성씨가 달라요 . 동성동본인 경우에는 원래는 혼인 자체가 성립이 안됬어요 . 서양은 결혼을 하면 부인이 남편성을 따라가죠. 우리나라는 결혼해도 여자 성이 바뀌지 않는데 . 부계혈통이라는게 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에 결혼후에도 아버지의 성을 바꾸지 못하는거죠 . 어쨋든 우리나라으 ㅣ성씨는 부계원리에 의한 걸로 이어진다 . 아들은 다시 성씨르 물려주고 딸은 주지 못한다 . 본관이라고 하는거는 출신지죠. 안동권씨인 교수님 . 안동에서 산적이 없는ㄷ데 족보상에 이십몇대조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벼슬살이 하러 갔다., 그이후로 안동으로 간적이 없어도 수백년전 조상의 본관을 가지고 있는거국요. 본관이라고 하는게 성씨가 같다고 해서 같은 씨족인게 아니고 . 성씨와 본관이 같아야 동성동본이고 . 성씨와 본관이 족보를 만들게 되는데 ;. 처음으로 본관을 만들게 된게 누구냐 하면 . 시조 . 첫번째 조상 . 시자는 뭐냐면 처음시를 뜻한다. 성씨와 본관도 시조에서부터 시작된다 . 처음으로 성씨를 쓴게 시조고 그사람의 출신지가 본관이다 . 처음으로 시조가 된사람은 대개 우리나라 고구려성씨 고씨 . 부여씨 . 이런게 없죠 . 우리나라 김씨는 굉장히 많습니다. 신라를 근원으로 하는. 박혁거세가 신라박씨의 시조라고 할수있습니다 . 사료읽어줌 . 성씨를 박으로 했다 이런거 . 알이 박처럼 생겨서 박씨로 했따 . 박이라는 글자는 순박할 박자 라고 나오지만 별로 의미가 없죠 . 박씨는 순 우리말 성씨라고 할수 있는거에요 ;. 박씨는 중국에서 흔하지 않아요. 여기서 주목할점은 . 포유동물은 인간인데 난생인 사람이 있다는거죠. 이걸 일반인들과는 출생부터 달라야한다는 그게 있는거죠 우러러보고 그런것 . 왕으 ㅣ핏줄은 일반인들과 태생부터 다르다 라는걸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이야기가 있다 .
김씨랑 박씨랑 성이 기원전후. 이때쯤해서 삼국시대 초기부터 성씨를 썻다는게 되는데 . 사실 삼국사기라는 책이 고려때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사료기 때문에 이떄 성씨르 썻는지 나중에가서 뒤늦게 갖다 붙인건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신라시대 사람이 당대에 성씨를 쓰기 했나라는건 상당희 논란입니다 . 신라시대 금석문에는 성씨를 거으 ㅣ쓰지 않습니다 . 성씨를 사용한 예도 임금이라던가 왕족만 부분적으로 사용했따. 신하들도 거의 쓰지 않음 . 삼국시대엔 성을 썼다 이런게 별로 없다고 봐야하구요 . 성씨를 사용하게 된것은 중국의 영향이에요. 삼국시대부터 문ㄴ물을 경유하교 사람이 왓다갓다하고 전쟁도하고 . 중국사람이 우리나라로 오기도하고 .
우리나라사람이 중국에서 활동을 하려면 중국식 이름을 짓기도 했죠.우리나라 토속적인 이름들 .거칠부나 이사부나 이런것 이런것 한자는 아무 뜻도 없어요 , 그냥 이두로 표기한것 뿐. 주몽이라는 말이 . 활을 잘쏘는 뜼의 고구려 말입니다. 삼국시대 이름은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것이다 라고 할수있죠.
우리나라 성씨도 두가지가 있는데 한자가 들어오기 전의 성씨 . 이것은 고유의 성씨라고 할수 있는데 신라의 석박김. 토성이라고 하고 . 나머지 정씨 이런성이 중국에서 받아들인 성입니다 . 중국사람이라는게 아니고 .
천강성씨. 하늘에서 내려온 성씨. 귀족들은 신라말 까지도 성씨를 안썻고 나중에 고려말 조선초에 시작했다.
정씨 최씨 양씨 배씨 장씨 이런것들은 당나라에서 흔한 성씨인데 중국사람들과 교루하다보니 그냥 갖다 흉내내 쓴거에요 . 라말여초에 어떤 현상일 일어나냐면 순수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쳐 씁니다 . 창씨개명 이건 그냥 이렇게 쓴거고 . 실제는 아니고요. 우리말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기본적으로 이건 자발적으로 했다. 궁복이라는 사람이 장보고가 되었죠 . 장씨가 중국에서 흔한성이죠 . 궁복이라는 이름은 성은 없고 이름만있는데 . 궁예도 성이 없죠 . 성을 쓰려고 하다보니까 활궁자자잖아요 궁자가 들어간 중국의 유명성씨를 갖다 쓰니까 장씨가 된겁니다 .
복은 늘려서 읽으면 보고가 되니까요. 전형적인 중국식 이름을 갖추려고 한겁니다 . 홍술 이란사람이 홍을 자기 성씨로 쓴건데 . 글자를 바꿔서 홍유로 이름을 바꿉니다. 태조왕건의 공신들 . 이런식의 현상이 일어나서 태조 때분터 광종떄까지 고려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는데 이름이 이렇게 세련되게 바뀝니다 . 중국식으로 이름ㅇ 바뀝니다 . 지금은 다시 한글이름이 쓰이기도 하죠 . 태조 왕건 조차도 나라를 세워서 창업주가 되었다는 그도 . 왕씨성은 왕이 됬잖아요 . 그래서 내가 성을 킹으로 하겠따 . 그래서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여서 왕씨가 된겁니다 .
10세기 초의 한국어는 기장을왕이라고 했습니다 . 기장하고 왕하고 동음이으이어 였떤거에요. 잡곡중에 하나에요.
왕건의 아버지도 왕융이 아니라 용건이였는데 . 왕이되면서 아버지 이름도 바꿔주었습니다. 태조부터 경종때까지 중앙관직을 지낸 사람은 대부분 성씨를 쓰고있따 . 점점 지방까지 확산이 되었다 . 조선시대까지도 성씨를 안쓴사람이 있죠 . 노비. 노비들은 조선말까지도 성씨르 안쓰다가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 근대적 호적제도가 도입되면서 . 노비들이 시조가 되어야하는데 . 시조가 되는걸 포기하고 누군가의 자손으로 끼어들어가는거죠.. 성씨의 계승원리는 부계성과 가족성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부계성. 예외적으로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 고려초기까지만 해도 왕족은 근친혼을 했어요 . 천추태후는 황보씨인데 . 이 사람의 아버지는 태조왕건의 아들 . 이사람은 왜 황보씨인가 . 왜 황보씨냐면 어머니가 신정왕후 유씨에요 . 할머니를 따라서 황보씨가 되었죠 . 왜 할머니 성을 따랏냐면 . 이사람은 경종과 결혼했는데 . 결과적으로 왕씨끼리 결혼한거죠. 문제는 이런상황에서 중국에 국서를 보내는데 . 왕씨가 겹치면 중국에서는 야만인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그래서 호적세탁을 한거죠. 할머니쪽성을 따라가지고 황보씨를 썻습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통해서 이야기를 되는데요..
본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본관은 시조가살았떤 곳을 기준으로 합니다 . 최소한 시 나 군을 기준으로 합니다. 군현 단위를 본관으로 삼게되는데 . 본관이 같다는건 시조가 같다는걸 으미합니다 . 안동김씨다! 라고 하면 나랑 왕비랑 중전마마랑 같은 동성동본이다 . 라는건 나의 신분적 가치가 올라가는게 되져 . 그렇기 떄문에 문벌의식을 나타내는 기호역활을 했습니다 . 본관은 지금도 있어요 . 한쪾에 나와요.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문서내에 본관이 들어가는게 전통이 굉장히 오래 남아있는거죠 . 본관이 잘 정리된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군현 항목마다 토성이라고 되어있어서 , 군현의 토착성씨들이 쭉 열거되어있어요. 경주를 본관으로하는 성씨들을 쭉 씁니다 . 토성이라고 하고 . 본관들 중에 지역적 조건을 따져보면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할까 철칙이 있어요. 대동강과 청천만 이남의 지역에만 있어요 . 통일신라 고려의 북쪽 경계 . 함흥이라던가 . 온성 나선 이런 지역에는 성씨가 거의 없어요. 고려초에 본관이 생겼기 때문에 . 대부분 시조들도 고려 이전의 인물로 하는데 . 조선초가 되어야 두만강 압록강으로 올라가고 . 이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여진족이죠 한가지 예외는 있는데요 . 청해이씨가 있는데 청해는 어디냐면은 함경북도 북청이거든요. 청해이씨의 시조는 툰드란인데.; 이성계가 여진 지역에서 일어났잖아요. 여진족들과 굉장히 친하고 집안에 여진족 사람이 많은데 . 북청지역을 본관으로하는 시조가 생긴겁니다 . 태조이성계가 성씨를 하사했어요 . 왕이 우대할떄 왕과 같은 성을 줍니다 . 피휘는?? 고려왕씨는 왕을 많이 주었어 . 이성계는 성을 줄 기회가 많이 없엇어요. 여진족에게 많이 주었죠. 요 지역 내에만 본관이 있었다.
본관제도라는게 어떻게 만들어졋냐면 본관이라는게 처음부터 있던게 아니라 . 시조가 된사람들은 자기가 시조라는걸 알았을까요 . 자기가 시조라는 의식은 없어요 . 시조라는건 대개 자손들이 거꾸로 올라가서 조사하다보니까 시조라는분이 있구나 . 내가 추적가능한 가장 윗대의 인물. 이러다 보니가 본관이라는게 처음부터 성씨와 관련있던게 아니고 . 너는 어디 최씨라고 꼬리표 붙여놓은게 본관이에요 . 고려 초기에 지방을 잘 통제하지 못했어요,. 지방 군벌들을 다독여서 억지로 붙여놓은게 고려에요. 그러다 보니 지방세력이 목소리가 커요. 고려는 그걸 통제하기위해 본관을 지정해 놓고 사심관제도를 만들어 노았는데 . 내향 외향 처향 조모향 . 아빠 내향 . 엄마외향. 처의 처향. 할머니쪽 조모향. 이러다보니 연고가 강한데 국왕들에게 출신지역을 관리할것을 약속합니다
누가 어디 출신인지 알기위해서 본관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본관과 성씨를 붙여서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 정중부는 해주 정씨다 이렇게 부르게 되었는데 . 그렇게 부르는 관습은 고려후기부터는 확실이 본관과 성씨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따 . 왕실과 혼실이 가능하려면 가문들 이름을 재상지() 이 되어야한다. 본관이 부호가 된다. 우리가 성씨만 가지고는 조상이 같은지 모르기 떄문에 본관하고 성씨르 붙여서 구분을 합니다 . 동성동본인데 시조가 다르기도 합니다 . 성씨의 단위로 가면 조상이 다를경우가 많은데 . 본관하고 성씨가 같은데 조상이 다른경우는 아주 적어요 안동김씨는 예외이고 .우리나라는 특징이 김이박 최정이 . 가장 흔한 성씨인데 이들만 모아도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는 다섯개 성씨를 가진 사람이라는거죠. 성씨의 다양성이 굉장히 부족한데 /.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어느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은 고을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가장 많고 . 그다음 진주 전주 밀양 청주 이렇게 가는데 . 공통점들이 대가 남부지역 /삼남지역이라고 하죠.
인구는 북한보다 남한이 두배 많죠 . 경제력과 인구와 이런게 남부에 집중되어 있죠. 그렇게 본관이 특정 고을에 집중되는 현상을 볼수 잇죠 . 본관하고 출신지가 일치되지 않죠 가족관게 증명서를 보면 본관에 안동이라고 나오 져. 본적이라고 들어보셨죠. 실질적으로 해방이후에 인구이동이 심하고 조상의 출신지 . 어디사람이라고 하는 정체성 . 이런식으로 집안의 고향이라는걸 따지기위해 본적을 따지기 시작했는데 . 본적이라는건 본관의 하위개념이라고 할까요. 본관하고 비슷한. 본관이 너무 옜날 옜적에 만든거라 그렇지 . 예전에는 거주지와 일치했다는 것이죠 . 우리나라에서 지리지를 만들때 . 출신지하고 인물을 연결을 할떄 출신지와 연결을 안하고 . 실제 거주지가 아니라 본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 본관이 그냥 경주인 사람을 경주인이라고 부르는거죠.
자손들이 남북으로 헤어지고 백대가 되어도 바꾸지 않아서 지리지에 올라가도 거주지와 일치하지않는 문제가 생긴다 . 1960년대에 나온 책에보면 다산정약용은 남양주시 사람 광주사람인데. 본관이 압해정씨에요 나주정씨라고도 하는데 . 압해라고 하는곳은 전라도 고을인데 . 조선시대 행정고을이 통폐합이 되면서 압해가 나주로 통폐합ㄴ되면서 나주정씨라고 하기도 하는데 . 정약정은 실제 거주지대로 경기도사람이라고 하고 정약용은 나주사람이라고 하는데 전라도와 전혀 연고가 업는사람인데 말입니다 . 비슷한예가 너무나 많아요 .
덕수 이씨 인데 덕수는 개품군에 있었던 옛날 고을 이름입니다 . 충무 이순신은 개성쪽과 아무관계가 없어요 . 한양에서 태어났고 충청과 아산에서 거주를 했습니다 . 인명사전에는 덕수 사람이라고 쓰이기도 하죠. 율곡이이랑 같은 덕수이씨에요 율곡이이도 덕수랑 상관이 없습니다 . 강릉에서 태어났어요.
오죽헌에서태어났죠. 덕수이씨네 집이 아니고 외가의 집이에요 남귀 여가혼. 덕수하고 아주 관계가 없구요 .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진주에 보면 진주의 큰인물들을 알아보는데 . 하륜 .하연이나 강희안 강희맹 이사람들은 왜 진주 에 소개되냐면 여기 살았던게 아니라 . 진주 하씨라서 써있는거죠 . 아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수당떄까지만 해도 중국도 본관이 바뀌지 않았는데 . 송나라 이후부터는 실제 거주지에 따라 본관이 바뀌었습니다.
본관이라고 하는게 상대적으로. 족보를 왜 위조했을까요 . 양반족보에 들어가기 위해서 . 우리 조상중에 양반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 남의 조상을 내 조상이라고 사칭하는겁니다 . 근데 성이 아예 바뀌면 찜찜한거에요. 그래서 성씨를 바꾸기 보다는 본관을 바꿔요 . 내가 정씨인데 포은 정몽주의 정씨로 들어가거나 그런게 있는거에요. 태씨의 시조가 누구냐면 대조영이에요 . 이사람들은 영주태씨라고 하는 태씨인데 본관 자체가 브랜드가 된겁니다 . 굉장히 유명해져 버려서 고을 이름자체가 이름값을 하게 되는거에요. 유명한 성씨는 본관이 보잘것 없어도 잘 안바꿉니다 . 덕수이씨도 덕수가 없어져도 쓰게 되져 . 반남이 어딜까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 인데 반남이라는 별도의 고을이 있었어요 반남 박씨가 유명한 인물을 많이 냈어요. 박씨는 아는거에요
이거는 굳이 나주박씨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 풍산유씨 . 풍산은 어디에요 풍산그룹. 유성룡이 풍산. 안동이에요. 하회마을이 집성촌입니다 . 기계유씨 . 경주의 고을인데 유명해지면서 기계도 쓰죠 . 본관들이 유명한 고을로 본관을 바꾸는거에요. 듣보잡 지명을 누구나 아는 지명으로 바꾸는거죠 . 본관이 조선초에는 풍부했는데 .점점 하나로 합쳐져 버리죠. 또한가지가 외국출신 시조가어떻게 되는가 원칙은 처음으로 정착한곳이 본관이 됩니다 .
부산에 정착하면 부산 뭐씨로 쓰게 되겠죠. 참고로 김수로의 왕비 허황옥인데 . 인도의 사람이냐 .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 동화되 버렸기 때문에; 족보를 보면 외국계가 너무 많아요. 통계에 따르면 순수 한반도 출시 아닌 귀화성씨가 20%도 된다 . 다섯명중 한명은 조상이 외국계라는 말이 되는데 사실은 . 대부부은 중국에서 왔다.
오늘날은 중국을 비하해서 보지만 .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문화의 본고장이자 문명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만 해도 균형점이 불교인데 .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보지 않았느데 조선은 성리학 때문에 한족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된다 . 우리 조상님이 중국사람잉라ㅗㄱ 이야기하고싶은거에요. 중국에서 왓다고 하면 문화인이라고 내세울수 있고 . 중국에서 왓다고하면 증빙을 제출할 필요가 없다 . 중구에서 오느라 자료를 잊었따고 하면 되기때문에 . 이렇게 주장 많이 했다 . 왕건도 그랬는데 조상이 당나라 황제였다고 이럲식으로 포장을 하는데 중국의 권위를 등에 업으려는 주장을했다. 강씨성. 당성이라는 사람인데 절강영주 밀양 강씨 들.
당성이 원나라 말기에 와서 중국에 전문가로 일했고 벼슬을 받아서 정착한곳이 밀양이다 . 항주 이씨 원나라 말기 난리를 피해서 와서 성을 갖게 되었다 . 한족이 아닌경우도 있어요. 경주설씨 원나라를 통해서 위구르 사람이 오기도 했따 . 여기까지 공식적인 사료에 나오느거고 . 이용상이라는 사람은 베트남 사람인데 이건 족보에만 나와요. 베트남도 우리나라 처럼 한자를 썼는데 베트남 이씨왕조가 진씨왕조에게 나라가 망했따. 그러다 보니 이씨중에 한사람이 바다를 통해 도망왕서 우리나라로 왔따 . 그리고 이용상이라고 하는. 성을 가졌죠 베트남과 이름형식이 같아서 베트남 이씨가 그래도 이씨가 되어 화산이씨가 되었다 . 사야가 . 사야가는 가등청정의 장수중 한명인데 . 김씨성을 받아 김충선이 되었다. 이런경우들이 있는데 . 믿을수 있다. 그러나 상당부분은 사료적 근거가 없다. 시조는 족보에서 꼭대기에 있는ㅅ 사람입니다. 족보에 실려있는 사람은 시조의 공통자손이죠. 부계 자손이죠. 남계 자손. 고려 태조에의해서 신라박씨들이 전라도 나주에 가서 살게 되었고 그게 반남박씨의 시조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중에 가장 높은사람을 시조로 삼았다. 조상들이 별볼일 없는살마들이 대는 변명이 바로 왕씨에 충성해서 조선에게 벼슬을 안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족보사람들의 딜레마는 잘난조상을 시조라 하느냐 . 별볼얼 없지만 윗대의 조상을 더 우선으로 하느냐 . 이런딜레마가 있으다. 결국에는 윗대의 조상이 별볼일 없더라도 존중하는것으로 함. 중시조의 개념. 집안을 일으킨 사람이다 라고 해서 중시하기도합니다. 명목상의 시조와 실질상의 시조는 단선으로 연결되어있다. 단선계보로 이어지는거느 나중에 사후에 만들다보니 단선이 된다 . 김종직이 쓴거에 보면 실질적인 시조와 명목상의 시조가 나오게 된다 . 지역과 혈연이 합쳐진 공동체 . 집성촌이라고 한다. 동성촌에 처음으로 살게된 사람을 향시조라고 한다. 하회유씨 이렇게 하는데 .본관이 바뀐게 아니라 별명처럼 쓰이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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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하고 본관에대해서 말씀드릴게요 . 족보의 정의를. 성씨와 본관을 해서 씨족집단의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가지고 그런의미에서 족보으 ㅣ역사라는건 . 엄밀한 의미에서의 족보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거죠
문자가 출현하기 전부터 조상의 계보를 정리하는것은 있었다. 사람 머리속에 있는게 유일한 기록이고 머리에서 머리로 직접 전달하는게 구술하는게 유일했다 . 근본적인 이유는 호기심이죠. 아버지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옛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하고. 호기심이죠 호기심만으로 족보를 만드는데 고질적인 사회적인 목적이 이기 때문에 족보라는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 족보가 필요하게된 사회적인 목적에 해서 / 오직 혈통만을 기록하기 위한.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서 . 행장이나 행록이라고 하는 전통시대 인물의 일대기를 전기를 쓴거거든요 그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기록이다. 이걸 토대로 왜 만들었냐면 위대한 인물이면 비석을 세우죠 . 요약해서 쓰는데 그런데 외부에 설치하는비석도 있지만 무덤은 관리 안해주면 금방 못알아보거든요 . 묘지명이라고 해가지고 기와라던가 구워서 만드는거에다가 현판을 만들어서 묻어놓습니다. 안에다가 넣기도 하고 그런것들이 발견이 되면 무덤이 이던 자리구나 라는걸 알수있죠 . 기록의 서두에 그살마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 그사람의 조상에 대한것드잉 써있고 . 이전의 가계. 족보의 실물이 없어요 고려시대에 . 기록은 있어요 분명히 . 묘지석을 씁면서
족보를 쓰고 이런내용으로 비석을 세웠다 , 근데 족보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요. 가까운 일본이라던가 . 전쟁이 많아서 책들이 많이 없어졋다. 일본같은경우는 많았지만 동시대 책들이 많이 남았다. 단적인 예로 고려시대 쓴 역사책인 고려실록이 있었지만. 조선시대 고려사를 편찬할때만해도 있었는데 지금 은 없다. 임진왜란때 없어진것 같다, 고려시대 족보와 비슷하다. 다른기록으로 간접적으로 확인할수 밖에 없다. 고려시대 족보는 초보적이었을것다.
족보의 기록은 언제가 처음이었을까 씨족은 혈연적으로 공통의 조상이 있다. 기록이 없으요 . 공통의 조상이 있다고는하는데 조상과 나의 관계가 전혀 전해지지 않아요. 단군이 공통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그 중간의 모든 조상을 다 아나요? 씨족공동체는 막연히 조상이라고 하는 시조라는 살마도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역사가 아닌 막연한 신화속으 ㅣ인물이다. 제가 화백 정사암회의 . 공통의 축제가 있어요 . 동예의 무천. 영고가 부여 . 고구려 동맹 이런 고대 부족국가의 축제가있는데 . 그 축제에서 조상제사의식이 있엇고 조상들은 대개 하늘에서 전해져 왔고 . 동물이라는 상징이 있었고. 왕족중심으로 구전되었다. 문자가 등장하는거는 대개 중국의 문자를 수입했죠.
청동기 철기 되면 굉장히 큰 규모의 부족이 넘어간 게 나오는데 .신분차별이 심해지고 요 단게로 가면 국왕의 혈통과 일반 구성원들과 혈통을 차별화 시키는 그런 단계이다. 차별화 복잡화 시킨다. 지금의 집안시에 있는ㄷ
광개토 대왕릉비에 나오는데 문자화가 되는겁니다.
17세손에 이르러 . 몇대손인지가 전해지는거에요 . 구체적인 계보가 전해지는거죠 . 이단계로 가면 하늘의 아들이라는 그런게 아니라 . 구체적으로 나외느거죠 . 막연한 씨족 과 리니지의 차이 . 둘다 씨족 공동체로 동일 조상의 자손인건데 . 씨족은 특정조상은 전해지지만 막연한 존재이고 .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요 . 이 종족은 가계 기록이 있었가지고 구체적으로 혈열ㄴ관계가 전해집니다. 자손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 서로간의 관계 혈연관계의 멀고 가까움이 전해집니다. 씨족에서 친족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 그래서 이제 삼국사기 신라 중대 이후로 가면서 .
구체적인 왕의 계보가 전해지게 됩니다 . 통일신라 이때로 가면 나중에 소급해서 쓴 기록이 많아서 진짜인지는 모르고 . 통일 신라 이후단계로 가면 구체적으로 계보를 따져가면서 하고 . 결정적으로 뒷바침하는게 뭐냐면 .신라인 스스로 족보등을 발행을 했다 . 신라가 중국으로 부터 여러가지 받아들이는데 . 개인 족보물 등도 이단계에 많이 드러나고. 김유신전도 행록이 전해져서 그걸 이제 취사선택해서 쓴다라고 하져. 김유신의 자손이 만든 신라시대의 그게 있다는게 되져 현손은 고손자이다. 중국에서 왓다고하면 증빙자료를 댈팰요 없다 . 잃어버렷다고 함 고구려 출신이라고 하면 망한 왕조의 백성이잖아요 . 차별의 대상이란말이야 . 그러다보니까 사실은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어쩌다 고구려온 당나라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거지 . 계림에 눌러 앉았다고. 뭐 이런식으로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거지. 신라시대는 행록에 간략하게 써논거에 적어논거지나지 않고 . 초보적이나마 계보에 대해 쓴것은 고려시대부터라는거죠 . 용어가 있따 는거죠 .
그사람한테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대라 . 이런것들을 대라하는거죠. 아버지만 확인하는거느 부족하다는거죠. 최소한의 단위인 4조인대요 . 아빠 할아버지 증조부 그리고 외할아지 . 네명.
고려가 당나라제도를 많이 이용하거든요 . 중국은 대단히 부계이지만. 그렇지만 고려는 중국의 제도를 ㅂ다아들이면서도 기본적으로 외조부까지 확인을 합니다. 아빠는 괜찬은데 엄마쪽이 노비이면 천첩니죠/
양민출신 첩이면 괜찮은데 청민출신 첩이면 . 이사람의 신분이 노비가 되죠. 아버지가 양반인데 어머니가 노비니까 . 자식이 노비가 됩니다. 여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 신씨라고 성만 전해진다. 근데 노비들은 이름이 나와요 .
양반여성들 한글이름을 지어줬는데 그래서 전해지지 않는게 아닐까 하고. 노비들은 토속이름이 그대로 나와요. 예를 들어서 어우도 어을우동이라고 나오는데 . 양반여성이지만 이유는 간통을 많이해서 . 양반취급을 안해주는것 같다. 실제로 성종이 . 고려말 안동권씨에 대해서 ㄱ안동권씨 의 이야기인데 고려사는 조선초기의 기록인데
고려사에 나오는겅하고 권소평이라는 인물은 몽고가 고려 간섭 직전이고. 그 다음은 원간섭기 사람이고 . 기득권 세력들이라고 봐야하는데 시대적으로 점점 내려갈수록 어떤 차이강 ㅣㅆ냐면은 하나하나 보면 안동부 사람이라는건는 본관이 안동사람이라는거고 .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까지만 기재하고 있죠 안동사람인데 가문이 한미하여 한미하다고 하고 . 아들하고 손자가 잘됬어요 . 손자가 단인데 . 단의 묘지명을 보면 권씨는 안동의 뛰어난 가문이다 라고 하는데 . 여기에 가면 뛰아난 가문이고 . 증조하라버지까지 이야기 하고이꼬. 한세대 더 뒤로 가면 .
권씨는 신라으 ㅣ대성이라고 이야기 하고있어요 . 시조의 이야기가 나오고있어요 . 시조는 먼 조상이에요 . 안동의 호족으로 있을때 태조에게 항복하니 태조가 권씨성을 주었다고 하는데 . 시조에 대한 기록은 고려말기쯤 되어야 . 나오져 . 이색 고려말의 성리학자 이분이 쓴 정씨의 족보를 만들었어요 . 왜냐면 정추라고 하는 이사람이 요청을 해서 이색이 이 집안의 족보를 쓰게 되었어요. 이 내용은 표를 보셈. 왜 육세대부터만 자손이 있을까 . 이유는 정추 저사람이 부탁한 사람이 주도를 했는데 . 이사람도 증조할아버를 같이하는 친척들을 모르는 겁니다. 예전 친척들과 연락이 안되는거에요 . 후세대에 소급해서 올라가는 족보의 특징입니다.
이하 그래프 설명. 정씨의 족보인데 타성이 많죠 . 정씨와 타성을 구분하지 않았고 이시대는 남자가 처가살이를 많이 했다고 했죠. 딸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혈통도 많이 확인할수가 있구요. 또한가지 중요한게 . 기록을 할때 지금 남자부터 기록하고 딸을 기록합니다 . 선남후녀 인데 . 여기 보면은 살아있는 세대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기록되는데 이것은 나이순으로 보고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나가 당연히 맏이이기 때문에 . 앞에 기록을 하고요 .
5세대까지 단선으로 이어지다가 6세대 부터 퍼지는데 . 이 족보에서는 정씨는 일부에 지나지 않고 타성이 굉장히 많은 특이점을 보이고 있다 . 15세기가 되면 안동권씨 성화보가 최초의 족보인데 . 그전에 나타났던 기초적인 것들이 실물이 확인이 되는데 . 팔고조도 가첩등이 있고요. 큰 종이에 접어가지고 여기에 계보를 그린거죠 계보도에요 . 이게 그게 하나의 큰 메모지라고 할까요 . 하나의 도표. 계보를 도표형식으로 하는 족도라는거죠. 족보보다 수준이 낮은 기록이고 . 1~5까지 단선이다가 . 자녀를 출생순으로 기재하고 .
팔고조도가 있는데 . 하나의 종이에 자신이 밑에 있고 위로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 쓴다. 고조부는 여덟명이니까
팔고조도라고 한다. 서양에도 비슷한게 있는데 . 서양의 팔고조도 .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죠 .
팔고조의 모든 자손을 망라한 기록. 8고조 할아버지들의 모든 자손들이 나랑 팔촌이거든요 . 팔손도.
내외 삼종형제로 되어있습니다. 종형제가 4촌 재종형제가 6촌 8촌형제는 삼종형제
부계혈통주의를 허무하게 만드는게 팔고조도이다. 16명의 고조의 모든 자손의 기록. 을 모두 쓴게 팔고조 자손도 거시기이다. 다음주에 또할꺼임 뿌잉 특징은 자기중심적인게 특징. 나한테만 의미가 있져 . 그리고 엄마아빠 의 자손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아요 뿌잉.
선공보도 !! 특징 남계만 . 조선초기의 예외적인 현상
0405 4강
정씨 가저은 문집에 들어가 있는 계보에 불과해요 . 지금은 친손자 외손자 구분이 없는 시대에 살고있다고 생각을 해요. 친정 부모님은 어쩌다 한번 보는것 이라고 옛날엔 그럤는데 지금은 안그래요 . 계보의 중요성이라는게 성별에 의해서 좌지우지 했던게 유교사회에요.
사촌이라는 단어와 친사촌 외사촌 고종사촌 이종사촌. 영어에서는 안씁니다. 인류사회를 두가지로 보면 혈연관계의 성별을 구별하는 친족관념과 구별하지 않는 친족관념이 있는데 유교는 구별해요 . 서양은 안하고 . 고려시대 이전의 한국사회에선느 혈연의 계통을 구별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는 우리말 외할머니의 외는 바깥 외자잖아요 한자어에는 혈연의 계통을 구별하는 단어가 있는데 순우리말에는 없죠 . 이걸 설명하는 이유는 조선시대 족보에가서도 이런게 남아있ㄴ다는겁니다. 정씨가전의 족보를 나타냈는데 족보의 특성은 조상을 중심으로 자손을 망라하는데 . 이런 계보를 피라미드 구조의 계보라고 하는데 이중에 청주 정씨는 소소한 줄기에 지나지 않고 상당부분은 다른성씨의인물들이 외손이라 사위라는 이름으로 소속되어 있습니다. 실제 정씨 족보지만 정씨가 아닌사람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지요. 똑같은 이야기를 안동권씨 성화보라는 것에서 쓰겠습니다. 가계 기록이 15이후부터는 실물이 확인 가능한데 . 해주오씨족도 . 한장의 종이로 가능한 많은 사람을 집어 넣었고 . 여러가지 가계기록의 형태로 팔고조도 . 역피라미드 형태입니다. 역피라미드 형태라는것은 가첩이라던지 자손록이라던가 이런것들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람이 많아지지만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조상들이 점점 많아지죠. 내가 중심인 기록인거죠 . 역 피라미드 형태다. 자손중심의 역피라미드 형태.
현대사회에서는 이게 맞다고 생각을 해요 . 나를 주체로 생각해서. 팔성족보, 팔고조도를 응용한것 , 고조할아버지가 몇명이야. 8 할머니도 8명 , 내외 팔성족보는 8고조부의 모든 자손을 기록한것. 실물은 없어용 . 철성이씨족보지도를 보면 딸이 먼저 기록이 되어있다. 사위가 먼저 기록되고 아들이 다음에 기록되었다. 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기제 순서의 원칙은 나이 . 내외 사촌을 망라 했는데 쓰인사람이 수백명이 됩니다 . 인원수가 굉장히 많아요 .
김종직 이 쓴 선공보도 . 선공보도는 철성이씨떄와 다르게 아들들만 기록을 했어요. 이때는 친손자나 외손자나 같은 때였는데 이사람은 성리학자여서 동성과 타성을 일찍부터 구별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간 걸 제작을 했습니다. 자기의 직계조상들만 자세하게 자기 중심으로 팔촌중심으로 정리를 하고 나머지는 쳐냈고 . 자신에서부터 윗대로 가는 식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조상중심의 기록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편찬자의 중심으로 올라가는 특징이 있고 조선초기에는 성별을 구별하지 않지만 선공보도만이 예외이다. 선공보도는 오로지 남계만을 기록했다.
초기 족보의 편찬조건, 후기 족보의 편찬조건. #11 시험
5강 들어감. 조선때는 족보가 처음 나타나다. 500년간 족보가 발전해오면서 조선 말기에 가장 최전성기다 . 족보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시기는 일제. 해방이후에는 쇠퇴한다 .초기족보와 후기족보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나눈다. 초기족보와 후기족보는 과도기가 있엇요 17세기 . 임진왜란 끝나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서 조선사회가 크게 바뀝니다. 성리학 정통론. 유교원리주의가 강조되는데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바로잡자하는 거였고. 사람들의 생활에 까지 미쳐다
초기족보는 개인적인 작업이었고, 후기족보는 문중집단이 만들었고요 오늘날 종친회라고 하는 자손들의 단체가 만든ㄳ이다. 집단이 만들기 때문에 굉장히 체계적이다. 지방관으로 나갈기회필요는 왜냐면 관영의 각수를 이용해서 목판인쇄를 해야했기 때문. 또한가지 서적출판이 많이 이루어지는곳이 사찰. 조선시대는 사실 승려의 지위가 떨어져서 .
조선후기는 보소를 만들어서 위원회를 만들고 통문 메일이죠 통문을 이용해서 연락하고 역활을 분담해요 그래서 초기와 후기의 차이는 개인적 작업이냐 집단의 작업이냐에 대한 차이가 있겠죠 . 지방관으로 나간 자손을 통해서 작업을 하곤 했는데 작업참여자들 보면 여러 성씨가 섞여있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자손들이 연결되있고 성화보의 특징이 뭐냐면 아들의아들의아들 뿐만 아니라 아들 딸 아들 등등 경우수가 굉장히 많은데 이런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아는 내에서 다 수록을 했다. 성화보도 1-9세는 단선으로 연결되어있다. 외아들로만 연결되어있는데 이중에서 안동권씨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타성인물이고 서거정 같은 외손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복잡한 계보를 설명해야하는 다양한 계통의 외손들이 포함되어있다 . 결과는 안동권씨 족보라고 제목은 붙었지만 그중에서 380명만 권씨고 95%는 다양한 계보의 타성들이 들어가있다. 만성보라는거조, 문화유씨 가정보에서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기는 3만팔천명이 들어가 있는데 . 이중에 문화유씨는 천 사백명밖에 안된다. 가정과 성호는 연호다. 조선후기족보에는 연호 안쓴다 청나라라서.
문화유씨가정보에서 중복인원이 발생하기도 한다. #9 문화유씨중 191명이 참여했지만 친손은 5명 . 나머지는 외손이다.
문화유씨와 안동권씨와 교집합이 있다. 안동권씨가 문화유씨에 장가를 갔으면 사위로써 실려있을수도 있겠지.
집안끼리 급을 맞추어서 결혼을 하다보니 그런것이다. 어느 혈통 계통을 가던 신분은 똑같아요. 다르면 첩이고.
어느 계보선을 가도 신분적으로 비슷합니다. #10 경상도의 거의 모든 관리가 참여한 순흥안씨 족보. 사실 어느 집안의 족보를 만들어도 만드는 사람은 다 비슷하다. 동류집단의 족보다 ! 조선초기의 특징이죠. 그 증거는 성종부터 중종 75년간의 문과 급제자중 70%가 문화유씨 가정보에 수록, 친손과 외손으로 연결된 지배층양반의 만성보로 평가되고 혈연 네트워크는 혼인 네트워크고 지방관 네트워크 였다 . 이것은 성씨집단만이 아닌 유씨를 기준으로한 지배층 전반을 망라한 족보다 라고 말할수 있다.
조선후기 족보는 지방관이 나가서 지방관이 간행하는게 전기적인 방식이고 돈을 걷어서 만드는게 후기적인 방식이다.
해주정씨족보는 두개가 섞여있다. 18세기는 문중조직의 가동이라고 한다. 후기족보로 가면 실리고 싶은사람은 자기족보를 정리해서 써서 제출해라 . 이걸 모아서 족보를 만드는데. 공포는 옷감을 내도록함 돈의 기능. 19세기 풍양조씨의 족보는 명하전을 내게 했는데 이름아래에 붙는 돈이다 . 등록비이다. 예목전이라는것도 있었는데 . 지방관중 잘나가는 사람들이 더 낸다.
#18 파보가 생기면서 대동보라는 개념도 생겨남 사람수가 너무 많으니까 파라는 단위로 쪼개지기 시작함 . 대동항렬은 김새년 막년.
동기이론 양변 부변모변 총계 이런거 많네...
0412 족보
조선이 건국이 되고 유교적 국가체제가 완성이 된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중욯나 의미중에 하나가 생활 깊숙이까지 들어왔다는거고 친족관계에 굉장히 많이 영향을 끼쳣다고 생각합니다. 족보도 가계기록의 일종인데 족보이전의 가계기록도 포함시키기 위해서 둘다 썻습니다. 계보라는 말은 조상으로 이어져 나오는 혈통의 계보라고 하고 친족관념 보다는 큰 개념이죠. 친족은 혈연관계 인척관계로 이어지거나 배우자이거나 . 가족보다 큰 개념이져. 친족은 생활을 달리하는 넓은범위의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
부계와 모계 혼계 부계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계는 엄마엄마엄마엄마 혼계는 엄마아빠엄마 아빠
부계 보다 더 폭넓은 개념은 부변 모변 부측 모측. 모든 계통의 혈연을 모두 동등하게 인식을 하는 그런 가족제도였다. 이런 가족제도를 모두 포함하는것은 총계라고 표현한다. 모든 계보를 인식한다. 총계를 다른 말로는 부변 + 모변 으로 말합니다 부계 모계가 아님.
#5 딸이 중간에 6명 포함되면 음서혜택을 받을수 없엇는데 남녀 동등한 대우이던 고려에서 왜이런게 나왔냐면 당나라 제돌르 본받다 그렇게 됬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는 거의 없음. 촌수는 한자말잉지만 우리나람ㄴ 있다 중국은 없다. 8촌이 전통적인 가족관계 하에서 인식하는 친척의 한계. 8촌 형제가 죽으면 상복을 입습니다 상복 입는 관계 유복친. 4-6촌까지가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친척의 한계입니다. 친사촌 은 부계사촌 외종사촌은 외삼촌의 ㅈㅏ식 고종사촌은 고모의 자식 이종사촌은 이모의 자식 성별에 따라 네가지로 구분하는데 . 친속ㅇ 범위의 개별성 = ABC 모두 사촌간인가에 대한 생각 #9 . #10 친속의 변화 양측적 친속은 절대 구속력이 없는 범위이고 나의 존재에 위해 모이는 친족의 범위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부계 친족집단이 생선되어서 지속성이고 집단성이 을 가진 조직으로 재편된다. 양측적 친속은 특정계 보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한 지속력없는 범위 이고 집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며느리는 시댁의 구성원이다 사위는 처가의 구성원이아닌 손님일뿐 . 그렇기에 민법 개정전에는 친족집단이 양쪽과 달랐다 . 며느리는 남편과 같이 8촌까지 친족집단으로 되고 처가쪽은 장인장모만 친족으로 허용했다. 조선시대 친족범위인 오복제를 답습했다.
그러나 개정이 되었다 . #14 이거는 조선 계보와는 다르게 고대의 계보는 양측 부계로 다 썻다.
왕건의 계보이다 이거 왕건은 원래 왕씨가 아니고 성씨가 없었따. #33 참고 . #34 동기이론 -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많이 생각한다. 공자가 말하길 삶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음 알려하는가. 공자는 답을 회피 ! 그러나 주자때 들어와서 급변한다. 초혼 혼을 부르는것. 죽기전에 마지막에 불러보겠다는것이며 죽었다고선포하는것이기도 하고. 유교의 사후관은 허무하다 . 죽으면 흩어진다. 그러나 같은 기를 가진 자손이 부르면 기가 뭉쳐서 돌아온다. 사후봉양 . 그기가 자손의 기와 조상의 기가 같기 때문에 같은 기가 가진 자손이 같은기인 조상을 불러야 동기감응이 되어서 제사가 성사된다. 동기감응
-마지막 유교에서는 사후봉양이라고 하죠. 죽은 사람을 곁ㅇ에두고 모시는게 유교의 특징이에요. 종묘가 있잖아요 . 종묘는 역대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ㄴ는곳이죠. 신주는 나뭇토막. 신주는 옆으로 굉장히 긴 건물이죠. 돌아가신분을 위한 방을 만들다 보니 굉장히 길어졌다. 집에서 불이나면 신주부터 꺼내서 도망가야한다. 집에는 가묘가 있었따. 가묘는 단청을 해서 지어두었다. 사실 불교때는 화장이 많았다. 화장을 하고 부도는 사리가튼게 고승의 무덤이다. 사헌부 상소문은 고려때분터 있었던 화장 문화를 비판했다. 기가 사라지는걸 안타까워했다. 조선ㅅ전기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아들과 딸이 똑같은 자식이라고 생각하는거져.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부계혈통을 이루는 . 퇴계이황은 이런 얘기를 하죠 . 조선전기까지 아들이나 딸이 제사지내는거 이런건 상관없었는데
이황은 앞선사람이여서 이런이야기르 해요. 지금 사람은 아들이 없고 딸이 있으면 사사로운 정때문에 외손에게 제사하게 하고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있지요. 조선후기에는 재산상속도 균등상속도 차등상속으로 바뀌고 되고. 균분상속은 경국대전에 쓰여있는 말이야.
근데 17세기부터 바뀌어요. 딸보다는 아들로 맏아들에게 주로 이어지고. 근데 경국대전은 안고쳤어요 . 이건 그대로 있고 민간의 성격이 바뀐겁니다. 경국대전이 사문화된거죠. 제사도 윤회봉사에서 적장자 단독봉사로 바뀌었어요 . 남귀여가혼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귀속된다. 이거고 이게 바뀌어서 친영제도로 바뀌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분배내역을 써놓은게 화회문서의 사례입니다. 이때는 1526년이라 조선전기이고 2남 2녀가 균등상속한 내역을 기재해 두었는데 서자는 가장 마지막 왜냐면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
오복제는 옷이 다섯단계로 변화해서 5복제라고 불러요 . 아버지상이 더 크게 상복을 입죠. 아버지가 가장이니까. 이 오복제는 중국에서 들어왔어요. 고려시대에는 처가나 외가에 조선시대보다 더 배려를 해다는거져. 외래문화이기 때문에 그 형태를 어느정도 유지할수 밖에 ㅇ벗습니다. 고려시대의 특성에 맞게 남녀 균등으로 조금 완화 시켰다는거죠. 고려시대는 나를 중심으로 역피라미드 모양이다.
조선시대로 오면 나는 수많은 자손들중에 한명이에요. 시작은 우리 집안을 처음으로 시작한 조상님. 조상님으로 부터 시작을 합니다. 소순이라는 사람이 뭐라고했냐면 나의 할아버지와 증 고조 할아버지는 자세히 기록하지만 다른 조상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와 관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따 . 이런것을 볼때 나를 중심으로 쓰던 개인적인 족보가 가계중심으로 커졌다고 할수있죠 . 이러한것의 예에는 팔고조도가 있죠. 왕의 이름은 가장 위에 쓴다. 페이저 번호를 천자문으로 써놨다 ㅡㅡ . 그리고 조선전기 족보는 같은사람이 두번나오기도 하는데 조선후기는 그렇게 는 절대 안된다. 수많은 조상들중 부계만 족보에 기록하는것은 사회적인 관습에 의 해 규정되는 인위적인것이며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가변적인것. #71 확인 . 동방씨족지이지 족보가 아니다. 문화유씨 대성보 이런것들.
진정이씨족보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기록을 다가지고 있어서 변화를 보여줌. 선남 후녀 , 선적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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