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7
천왕은 제정일치 역활을 했어요 제사적인 정치적인 부분을 함꼐 했다는것이죠
통치자로써 역활을 당연히 했지만 합의적인 부분이 많았다는것이죠 천황이 그렇게 절대권력을 흔들수는 업었다. 1092년이 되면 그나마 천황의 권위가 흔들리게 시작하는데 사무라이 무사들이져 사무라이들 중에서 그중에 부하도 있고 땅도 있고 그런 무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무라이들이 등장해서 하나의 그룹이 무가정권을 만들어요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처럼 무가정권을 만들어요 천황은 있지만 천황에게 모든 권리를 일임 받아서 본인들이 하고싶은 정치를 해나가는것이죠 이런걸 막부정치라고 합니다. 일본역사중에는 총 3개의 막부가 있는데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에요.
막부의 우두머리를 쇼군이라고 합니다. 일단은 천황은 통치권을 박탈당하고 제사장적 역활만 담당하고
제정적으로 곤란하다 이것은 막부가 돈을 잘 안줘요 천황중에 똑똑한 사람이 막부시스템을 바꾸려고 시도를 했어요 그러다가 막부하고 충돌하고 져서 백주대낮에 관리들 목잘리고 천황이 죽임을 당하고 이런 일들을 몇번 시도하다가 실패한 경험이있어요 . 막부 입장에서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서 일을 하기는 하나 천황이 막부보다는 우세하면 안되는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완전히 차단을 하는것이지요.
정치적인 권한이 축소됬다 . 교툐는 여전히 천황및 대신들이 정치를 계속했다. 그들은 그들대로 교토에서 정치를 하고 그렇다면 막부는 어떻게 정치를 했냐면 우두머리가 쇼군이죠 쇼군밑에 사무라이들이
무인들의 계급에 따라 하는일이 달라지는것이죠 쇼군옆에서 자문을 하거나 세금을 거두는 사무라이도 있는거고 계급에 따라 달라지죠 막부는 사회적으로 실질적인 통치를 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천황의 대리인적 성격이었어요 자 인제 에도막부로 내려옵니다 1603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요 여전히 교토에는 천황이 있고 에도막부는 쇼군이 있는거죠 에도는 지금의 동경을 말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억하시죠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에야스 도요토미가 두려워했기때문에 황무지와 같은 지금의 동경 이른바 에도로 쫓아 버렸어요 거기에서 이에야스가 굉장히 오랫동안 도시를 형성하면서 때를 기다렸고 떄와 왔고 에도 막부를 열었지요 270년간 굉장히 평온한 시대를 열었지요. 이에야스 집안에서 쇼군직을 담당하고 혼돈의 전국시대를 지나 안정된 사회를 만들었다. 에도 지금의 동경에서 정치를 하고 각 지역은 충성도등을 기준으로 각지로 나누었다. 군사적 요충지 전략적 요충지 이런곳에 부하를 배치를 시킵니다 아니면 자기 가깝게 왜냐면 자기를 방어해 줄수 있도록 , 또한 충성한 신하들 이들을 배치를 시켜요 자신에게 충성을 안한사람들 이 사람들을 고옆에다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배치를 시켜 문제가 있으면 바로 견제할수 있도록 , 그러니까 지역을 나눠서 땅과 백성을 나눠줘 , 이 가신들은 이땅을 가지고 살다가 죽으면 아들에게 물려줘 . 이들은 이땅을 가지고 살다가 영주제처럼 세금을 이에야스에게 주면 끝이야 물론 교토에 천황은 있어요. 그래서 각 지역을 나누면서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 동경에 생활을 할수 있는거죠
270년이 넘는 안정기속에서 점점 문제가 벌어지고 나중에 자세히 하고 자연재해와 상권의 횡포에 의해서 에도막부의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840년에 아편전쟁에 일어나고 그런 가운데에 서양인이 온다드라 이런 두려운 마음에 10년 가다가 1850년에 미국의 페리장국이 개국을 요구하는 배를 가지고 오는것이죠 결국은 이 에도 막부가 미국과의 교섭의 진행과정에서 절차상에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 빌미로 해서 흔들리는 에도막부 보다는 새롭게 에도막부를 세워야한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정봉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뭐냐면 천황에게 일임받은 권리들을 전부 돌려준다는거죠 1867년에 일어납니다
이떄의 천황이 메이지 천황 . 천황의 정치권한이 쇼군이 아닌 천황 스스로 가지게 된건 약 700년 만입니다
칠백년만에 정치를 하게된건 어떤것이냐 무능한거지 할수가 없어 대정봉환 이후에도 마지막 쇼군이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천황은 많이 의지합니다 . 대신들도 잘 모르는데 뭘 . 결국은 이런 의지 하고 이런것들은 메이지 천황 옹립세력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는 완전히 패배를 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이게 여러분이 배웠어야할 에도막부까지의 일본역사 개관 이에요
0314
에도막부시대의 도래 270년간의 시기를 말합니다. 1603년이야 1867년까지 이 에도막부시대의 특징은 동아시아 에선 보기 힘든 무가정권이 오래 유지됬다는거야 이렇게 오래 지배했다는거는 굉장히 특이한 사항이지 도쿠가와 이야에야스가 굉장히 노련한 정치가에요 그래서 이에야스가 처음에 막부를 열때에는 유리한 조건은 아니였어 주군은 오다노부나가 오다노부나가의 오른팔이 도요토미와 같은급의 사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실력있는 장수였읍니다. 오다가 살해당하고 이 없는 통치의 중심이 누가 차지하느냐가 히데요시가 재빨리 차지합니다. 그러니 히데요시는 도쿠가와가 어떤존재야 . 불편하죠 . 도쿠가와가 실력도 있고 덕도 있기 때문에 냉정하기도 하고. 그래서 라이벌 관계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였죠 그래서 도쿠가와를 지금의 동경지역에 쫓아버려요 그때당시에 황무지야 그래서 그쪽에서 아주 한촌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살게 되져 . 숨죽이면서 살아야지 잘못하면 죽어 . 황무지였던 에도를 개간함으로서 에도가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그런사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정유재란에 죽어. 갑자기 도쿠가와에게 실권이 넘겨지게 된거야 왜그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무장들도 있었어요 .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래는 아이가 없어서 조카를 입양해서 자식으로 삼았는데 자기의 대권을 양자에게 넘겨주기위해 키웠는데 스무살가까이 키우고 자기 아이가 태어나 . 그러니 이 권한을 넘겨줄 조카가 불편해 그래서 쥬겨요 그래서 아주어린 자기 아들을 대권을 잇게 합니다. 아이가 10세도 안된 상황에서 도요토미가 죽어 . 도요토미는 도쿠가와에게 자기 아들을 부탁합니다 . 도요토미의 무장들을ㄴ 7년간 전쟁을 치루면서 경제력과 무력이 많이 떨어졌어 근데 도쿠가와는 밀려나서 살고있지만 이런 전쟁에 휘말리지않고 세력을 유지할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도요토미가 죽었을때 도쿠가와 오히려 다른 무장들보다 몇배의 군사력과 재정을 갖고 있었어요 . 시간 경제적 여유가 있었ㅇ죠 . 이에야스도 야망이 있어서 히데요시의 아들과 전쟁을 치뤄서 마지막으로 초토화 시키고 드디어 에도막부를 여는거져 경제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미 다른 다이묘들 세력이 반발할수도 없었어 . 이에야스는 중농정책을 중요시 했고 농사는 곡식의 기반이고 곡식가격의 안정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에도시대를 통해서 미곡의 안정이 이루어 지지 않아서 상인에게 이권이 돌아가긴 했지만 정책은 중농정책이야. 1700년대에 대기근이 두세번 일어나 그러면서 에도가 경제력을 많이 잃게되죠 . 일본의 정치는 두개야 하나는 쇼군직의 막부 교토의 천황 쇼군이란것은 일본천황이 쇼군을 임명하고 권리를 양도 받아 통치하는 형태이다. 쇼군은 천황의 밑에 있어요 그러나 천황이라는 존재는 목소리를 크게 낼수 없어 . 정치를 직접적으로 관여할수 없어 늘 막부의 감시를 받아 에도막부까지의 천황은 매우 경제력도 없고 군사력도 없고 문학 제사 등등 이런것들을 담당하는 제사적 기능만 담당했었습니다. 그랬기 땜누에 천황의 실권이라는것은 실권이라는것은 있을수 없고 에도의 쇼군이 정치를 하게되고 일본열도를 통치하는거죠 쇼군은 천황을 무시는 못해 . 일본은 신국사상 신이 내린 땅이야 이 신국사상의 정점은 천황이 하늘의 뜻을 받아 땅을 다스리는 중심자적 역활 , 하늘을 대신하는 역활이야 . 천황은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야 그래서 신앙의 대상인 천황을 함부로 할수 없어요. 그러나 정치적 군사적으로 천황에게 힘이 있는건 아니다 그래서 교토에서는 천황을 따르는 대신들이 있고 막부 중앙에는 쇼군이 있고 군사재편이 있는것이죠 그리고 천황이 우리나라 조선왕조 처럼 쇼군 밑에에도 쇼군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감찰기관 이런게 있어요 이런사ㅓ람들과 더불어 군대도 쇼군이 쥐고 있고 정치도 쥐고 있고. 교토에는 천황이 있어 동경에 쇼군이 있어 . 땅은 여러군데 똥강똥강 나눠서 쇼군이 제일 강한 츙성을 바친사람들을 가까이에 두고 충성도 낮은세력들 땅 옆에다가 충성스런 신하들을 바로 옆에다가 놓고 다스리게 하는거져 감시하라고. 요렇게 땅들이 나누어져 있읎니다. 그래서 지역정치를 땅을 나눠서 자기의 혈연관계와 충성도가 있는 자신의 가신들에게 전부 사무라이야 지식인이 아니야 이런사람들에게 이 땅을 나누어 줘요 그 땅을 계속 살수 있게끔 그 땅과 백성을 나누어 준다. 쵸닌 이라고 하는것은 번주의 성안에 상업과 수공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나누어준 땅에는 하나씩 성을 만들어요 이 성 안에 각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하와 영주들이 살아요 . 그리고 그성 바로 밑에서 상업과 수공업을 하는 장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여기 살게 하는거야 농민들을ㄴ 논과 밭이 있는 성과는 좀 떨어진 곳에 살게 하죠 이게 하나의 마을형태에요 이렇게해서 영주와 농민과 쵸닌들이 사는 마을형태들이 번이라고 합니다.이 건 행정구역의 하나로써 번의 주인을 번주라고 하고 서양의 영주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그래서 번주들은 부여받은 땅과 부여받은 백성들과 같이 잘먹고 잘살면돼 세금은 10분의 일정도만 쇼군에게 바치면 돼 분리됀 통치지배 구조가 열도에 있는거죠 이게 쭉 이어집니다. 이에야스의 혈연관계들을 땅을 나눠주고 그런 사람들이 다스리는 곳을 신판이라고 해요 후다이라는 제도도 있는데 후다이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후다이라고 해요 또하나 도자마라고 있어요 도자마 영주들은 히데요시 편에 섯ㅆ던 사람들 . 도쿠가와가 보기에 괘씸한 사람들을ㄴ 도자마 입니다. 도자마는 다스리기 어려운땅 작은규모의 땅 이런땅들을 받을수밖에 없지요. 이에야스 반발세력이었기 때문에 . 이들은 늘 불만이 많아요 모든혜택에서 배제되니까요 언제 어떻게 죽일지 몰라 자기같은 사람은 문제는 도쿠가와가 자체가 사무라이고 막부 자체가 사무라이기 때문에 무력은 떠날수가 없어요 . 내가 무력으로 차지했듯 무력으로 쫒길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에야스 가문의 사람들은 어떻게하면 영주를 통제할까 고민했어 . 그중에 하나가 상킨코타이는 각지방의 영주들에게 다이묘들에게 번주들에게 일년씩 에도에 와서 출석체크를 하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1년을 살아야해 자동차가 ㅇ없는데 썡으로 걸어서 여기로 가야하는데 동경에서 교토가 신칸센타고 두시간 반이에요 그러면 이 맨 끝에 있는 도자마들은 죽을맛인거야 산넘어가 야돼 고
내가 명색이 번주인데 홀랑 짐하나 들고 갈수 없는것아니야 수행원들 데리고 다닌다고 . 수행원을 적게는 백명 이백명인데 많게는 오백명까지 그사람들 먹을껀 내가다내, 자는것도 내가 다내 , 그래서 이 산킨코타이 제도때문에 이 들이 다니는 길에 여관과 말 교환하는거 이런게 발달합니다 . 그만큼 에도는 두려웠던 것이죠 . 나중에는 너무 번주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게되자 이거를 삼년에 한번씩만하자 일년단위말고. 번들이 자기마을에서 가져오는 토산물을 에도에서 팔기도 합니다. 우리의 양반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고 고리대금업을하는 번주들도 있어요 왜냐면 1700년대에 대 기근때문에 번들이 경제적으로 약화되 요 1730년대 까지 . 에도 막부는 사원을 통제하는데 왜냐면 이 영주들이 나중에 세금을 사찰들한테 돈을 몰래 주고 돈을 세탁하는 돈세탁하는게 많았어요 백만원을 걷는데 나 70만원밖에 못 걷었습니다 얘기하고 30만원은 사찰에 줘버리고 사찰은 수수료 받고 돈을 돌려주는거지 . 그런걸 못하게끔 사원을 통제하는거져 . 사찰안에 무사들이 거주하고있엇어요 . 스님이면서 살생을 하는거지. 이 사원은 무력이 늘 있었던 곳이야 돈있고 무력있으니까 사찰들이 맘에 안들면 데모도 일으켜요 . 골치아프니까 사원들을 통제했다는것이죠 . 또하나는 백성들은 어떻게 세금을 톡톡히 메기냐 . 호구조사를 해야하잖아요 어떻게 시키냐면 이때 당시에 열도에 서양선교사들이 많이 오는데 자꾸 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는데 전파 못하게하는 여러가지 아이디어중에 아예 태어나자마자 사찰에 등록시키는거에요 자연스럽게 종교가 정해지고 크리스트교를 믿을수 없잖ㅇ아 . 사찰이 인구조사도 하고 종교 억제도 할수 있도록 그렇게 된거죠 /. 이런 사원을 통제하고 . 또하나는 교토를 감시했다.천황은 12세기부터 힘을 못써 근데 천황중에 세력을 모아서 막부를 뒤집어 엎는 천황이 나왔었거든 그런 사건을 몇번 격으니까 막부에서는 교토를 철저히 감시하고 최저의 생활비만 주고 감시하는거져 . 막부는 천황에 토지를 헌납하고 예를 갖추어 다이묘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감시를 하되 예를 갖추고 겉으로는 천황을 받을면서 . 대신 부하들도 내가 예를 갖추니까 너희들도 내게 이렇게 해라 . 토지를 헌납하긴 하지만 형식적인거고 . 토지의 노른자 땅은 전부 막부가 관리하게 됩나다. 공과 제 법도 이런것들. 막부의 감시중 하나가 여러가지 룰 을 만들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거고. 금중은 천황을 이야기 합니다. 공가는 천황이 데리고 있는 대신들. 이것을이 지켜야할 여러 법도를ㄹ 만들어서 법으로 꽁꽁 묶어버리는거죠 . 이러한 천황의 역활이 축소되고 조정이 사찰들과 접촉하는건ㄹ 막았어요 . 에도의 종교중에 신도라는게 있어요. 일본의 고유한 신앙이져 자연에는 영혼이 있다. 의인화 하는 어법이 많아요 . 고이장히 많은 신들을 섬김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신도의 교리도 완성이 됬어요 기본적으로 정치 질서에 완성이 되고 기본사상이 신국사상이에요 . 신도의 중심은 천황이 되요. 민중입장에서는 신앙의 대상인거에요. 군주가 아니라 . 나중에는 신도를 이용해서 열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막부는 신도를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막부는 쇼군의 신권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한 지역에 이에야스를 신봉하는 사당을 짓는다든지 그런일들을 합니다. 에도막부의 사회질서에 대해 보겠습니다. 에도 막부는 신분제가 있었어요 이건 조선과 비슷해요 . 사농공상 비슷하고 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아주 효율적이였죠. 에도 막부는 어디까지나 사무라이의 색이에요 . 군대와 같죠 .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게 뭐죠 상명하복이에요 . 이게 무너지면 안돼 . 철저한 지배가 중요해요. 각자 자기의 처한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는 그대로 수용하는 몫을 다하는 . 운명이 다했다면 내가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게 중요했어요 그중에 하나가 유교적 신분질서야 . 거기서 여기에 특별히 대항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 제일 좋은계급은 무사계급이에요 . 이 사람들은 성도 있어. 나중에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없어. 평민을 물론 여러가지 제한은 있어요 . 이 사무라이라고 하는 무사계급은 전체 의 7프로 밖에 안되요 극소수야 근데 이들이 지배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권한이 많이 있어야 하겠져 . 그렇기 때문에 사무라이가 무언가를 하고 있을때 평민이 가로지른다 . 그러면 목을베 /. 그만큼 엄격해 . 그만큼 사무라이가 지킬것도 많아. 어쨰거나 사무라이는 사회적 지휘를 보장받은 사람들이고. 그러면서 에도막부에 대한 충성도를 . 사무ㄹ라이로서의 지휘를 인정받고 책임감도 있었다. 그다음이 농민이에요. 넘버 투야 . 더군다나 중농정책ㅇ이야 .그만큼 중요하지만 말만 넘ㅂ투지 사는건 너무 어려워. 엄격한 통제 아래서 생활을 해요 . 기본적으로 에도때는 거주이전이 어려우요 . 내가 이사가면 누가 경작할꺼야 . 소출이 적어지잖아 . 세금은 어떻게 해 한번 막부에게 땅과 백성을 받은 이상 그건 계속 이어지는 거에요 . 갑자기 쇼군이 열받아서 삼십평을 뺏고 그러는 경우는 있어 그러지 않코서는 그땅 그백성 그대로 가거든요
잘 움직이기가 어려워요 .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출입도 어려워. 내가 사는 장소는 정해져 있는거에요.
공과상 이라는것은 이사람들은 넘버 쓰리야 농민보다는 미천해 이살마들 대부분은 장사를 하거나 공예품을 만들거나 하는 사람들인데 이사람드른 세금을 내긴내는데 농민보다는 덜내 책임감도 좀 떨어져
그리고 장사를 잘 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쓰냐면 고리대금업을해요 그래서 고리대금업을 누구랑 하냐면 돈이 많은 상인들은 번주랑 고리대금업을해 번주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권을 따내요. 예를 들면 전매 특권, 주조특권 , 구리 이런거 탄광 채굴특권 이런거 따내요 . 돈 빌리는 입장은 미안한 입장이니까 이런걸 허가해준다 이거지 상인들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겠어 . 돈은 돈을 벌어요. 세금 어느식으로 하냐면 예를 들면 거리고 좌판이면 거리에서 상가를 어떻게 만드냐면 보통 이렇게 가로로 크게 하게쬬 근데 길에 붙은 면적을 좁게하고 길게해 . 굴파듯이 엄청길게 파놔 이거 전체가 가게인 거에요 눈가리고 아웅인거지 . 심지어는 뒤에 정원도 있어 상인들이. 잘사는 상인들이. 그렇게 해서 세금을 감면받는다는지 자꾸만 상인들은 아주 부자가 되는 상인들이 많아요 . 미쯔이 스미토모. 일본의 재벌인데 이시대에 출발한 상인들이죠. 승려나 이런 살마들 교화계층 귀족 대신들 특수한 사람들. 신관은 제사하는 살마들 특별히 대우를 받습니다. 그다음에 최 하위가 천민층 . 히닌이라고 해요. 이런사람들은 거주지역도 설정하고 . 지역별로 특수한 지역을 이루어서 살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유교 지식인들과 에도지식은들은 달라요 조선의 유학자들은 국정을 움직여 하지만 사무라이가 지도층이던 일본은 어디까지나 브레인 역활이야 . 책사정도일까. 심지어 스님도 유교지식인도 많았어요. 유교를 공부하시는 학자의 분위기 인거지 국정을 운영하거나 그런건 아니였어요. 사무라이 중에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ㅇ으면 모를까 어려워. 유교의 수용과 더불어 지배게급이 확실한 에도시대는
가장의 권위가 절대화 되고 장자가 상습을하게되고 . 무가사회 주종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지주와 소작인 아빠와 아들 이런거. 오다노부나가가 선교사를 좋아해 호기심이 많아. 포교 활동을 해서 끝내는 삼십만정도가 되었어. 15만명이상의 개종자가 출현하기도 햇고 히데요시때에 금지되고 에도때 완벽히 1613년 완벽히 금지되고.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농민들이 반란지역이 크리스트교가 많이 퍼진지역이야 . 그러니까 쇼군이 옱타꾸나 잘됫다 막부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기독교 금지령을 내린거죠. 나중에는 교회를 파괴하고 추방하고 후미에라는게 다른게 아니라 성모마리아 상이나 이런것들을 땅바닥에 놓고 그 지역지역마다 쭉 줄세운 다음에 밟고 지나가게 하는거에요 . 후미가 밟다 에가 그림. 그림을 못밟고 주저주저 하면 죽이고 그러는거야. 나중에는 몰래몰래 밟고 그래요. 실질적으로 안 밟고 순교하는살마도 많았다. 1637년에 농민들이 반란하면서 기독교 신자 절멸하고 그러는데 이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 카쿠레 크리스챤 숨은다는 뜻의 ㅣ카쿠레. 기본적으로 쇄국이다. 개항한 지역도 있는데 큐슈지방에 나가사키라는 지방에 몇가지 장소를 설치해서 거기서만 교역을 할수 있도록 허락 했어요. 인공섬이야 나가사키 안에 배타고 가야해 그러니까 굉장히 고립되 어있죠 . 대마도 .. 대마도는 조선과 무역에서의 중심 . 대마도 같은경우는 반드시 모든 사절단 무역 작은 그런것들도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서 조선으로 들어가야해 대마도를 거치지 않으면 공식적이지 않은거야 외교적인 의례야 . 한반도와 열도 간의 꼭 있어야 하는것이 대마도라는 존재에요 . 사츠마라는거는 류큐와의 무역을 말하는거고 홋카이도 . 홋카이도에서는 아이누족들과 무역하는 마쯔마에 라는 기구에서 담당을 햇죠
조선 통신사는 일본 열도에 많이 왔죠 . 쇼군이 즉위를 하거나 특별한 경웨 왔는데 15명의 쇼군이 있었는데 에도막부시대에 . 근데 12번정도 왔어용. 조선 통신사가 선진문물을 전해준걸로 알고 있는데 ㅂ 아니야 그들은 아니였는데 . 일본의 설화 실화가운데 신공황후설화가 있어요 . 일본의 여자 천황이었던 사람의 신화인데. 이 사람이 한반도에 행태가 괴씸하여 바다의 거북이와 뭣들을 데리고 신라를 침공해 . 신라의 왕은 버선발로 나와서 잘못했다고 그러고 예를 갖춰요. 백제도. 그런 상황에 서 고구려 또한 자신도 잘하겠다면 빌어요 . 신공황후 설인데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라고 해서 삼한 정벌설이라고 해요 . 신라가 이제부터 일본열도에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겟다 약속을해 . 늘 보냇죠. 왜그랫냐면 나당연합이후에 . 멸망은 시켯으나 고구려백제 잔존세력때문에 신라가 고립된 시간이 있었는데 일본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일본 열도에 사신단이 늘 왔다는게 신화이다. 조선통신사는 우리 입장에선 문화전파이나 일본에서는 오던 사신단 조공단이 또오네 이런거라는 말이지.
메이지 이후에 조선인 멸시관이 생기는데 이게 삼한정벌설 이런데서 이런 흐름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지 .
그러면서 조선인들이 멸시받게되는 하나의 경위였다는거지 .
경제는 농업이 발달해요 기구도 발달하고 비료도 발달하고 수확량이 발달하죠 농업기술의 연구로 수확량이 늘게 되면 비를 세워주고 농업을 숭상합니다. 쵸닌은 랭킹 삼위지만 술도 만들고 부를 축적하는 상인이 많았다. 겐로쿠 문화는 몰라도 되지만 17세기 초의 오사카 중심의 상인들이 문화시설 이런걸 많이 다녀요 가부키같은거. 자연과학 고전연구 이런것도 많이해 . 에도막부의 안정과 함께 막부의 보호아래 번성. 쇄국정책을 오래했기때문에 일본만의 문화 사상등이 많이 발달했어요. 군신과 부자간의 관계를 앞세운 학문이 발달하는데 관학이져 . 하지만 그거과 달리 주자가 아니라 원래의 공자 맹자 이런것들 원류를 추구하는 학문도 발달 합니다. 양명학도 발달을 하죠 . 주된것은 주자학이다.
막부 말기를보면 무사가 쇠토 ㅣ합니다. 1092년 막부시대 인데 가마쿠라 200년 무로마치 이백년 그다음이 에도 막부가 오는데 그전 백년간은 밤낮없이 싸우는 전쟁의 기간인데요 . 이떄 일본은 어마어마한 구리를 채굴했고 . 어마어마하게 많은 칼 제조법이 발달했어요. 철에 대해서 제조가 발달했다. 100년과 싸웠다고 생각해봐 건축기술이 발달했어요 . 맨날 부서 맨날 지어 . 이떄의 건축기술의 발달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런 어떤 사회 전반의 현상들을 볼때에 사무라이들이 대접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훈련안하면 죽으니까 했다. 아ㅔ도 막부가 270년동안 전쟁이 없어 내전이 없어 싸울일이 없어. 사무라이는 두개의 칼을 가지고 다녀 . 작은건 나를 향하느 ㄴ칼이야. 배가를거. 전쟁할 일이 없어 찌를일이 없어. 평화의 시대야 . 점점 무사들이 쇠퇴를 하게 되져 이들이 행정관이 되는거야 . 이들이 이제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사무라이들은 정책에 필요한 일을 . 공무원처럼 사는거지. 관료가 되는거야 다이묘는 각번의 번주 주인들이고. 이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땅을 계속 먹어야 백성을 부하들을 먹이는데 . 인구는 게속 늘어나는데 주어진 백평은 여전히 백평이야. 백년전의 땅보다 늘어난게 없어. 근데 나는 인구가 늘었는데 땅은 그대로야 . 경제가 어려울수 밖에 없지 . 전쟁을 할수가 없으니까 . 쇼군이 허락해야만 하는거니까. 굉장히 다이묘들이 경제적 곤궁이 이어지는거지 . 처음에는 가신들에게 땅과 백성을 나눠줬거든 . 이제는 무슨 그땅을 가신에게 뻇어야 그리고 대신에 월급을 주요. 미곡값이 뛰면. 월급이 오르는거야 . 그래서 경제적 곤궁이 계속되는거야 .
땅과 백성을 나눠주던걸 뺏어서 봉급제로 바꾼다는거야. 농민층은 자급자족 농민층이 증가하기도 하고
농촌인구가 감소하고 1700년부터 화재도 많이나고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기근이 이루 말할수가 없어요
에도 시대의 흉작은 130번이라고 합니다. 대기근이 21회 이렇게 따지면 일년걸러 기근이였다는 거지요.
이런것드리 에도시대의 봉기로 일어나는데 에도 말기에 3천여건의 봉기가 집중되어있어요.
에도땐 국학이 발전하고 주자학에 대한 비판. 일본 기원에 대한 지적 복귀. 이른바 유교와 불교가 일본사회에 있었음에도 이것들을 배척하기 시작하고. 이것드를 제공한 중국을 멸시하기 시작하고.
일본의 기원에 대해 생각한 사람이 많았고 신국사상과 이어졌고 결국 천황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것이다. 물론 막부를 때려부수고 천황을 세우자는 아닌데 자꾸 백성들의 인심이 이반되고 구심점으로 천황을 내세우는것이 어떻겟느냐라는 제안이 있기 싲가한거야. 막부 말기에 정신적 지주를 천황으로 삼자란 말이 나온것이다. 양학도 발달했는데 네덜란드와의 무역만을 허락했다. 영국 프랑스는 포교때문에 쫓겨나고 네덜란드하고만 장사를 합니다. 서양학문이다 는 네덜란드 학문이다라고 했어요 . 이런 서향학문을 란가쿠라고 해요 . 또 하나는 기술 도입 의학. 봉건제도 부정에 대한 사상을 억압했어요. 네덜란드 책을 보게 되잖아 . 근데 네덜란드이 지식을 보면 세계 정세에 대해서 쓴것도 있는데 프랑스의 대학은 실력으로 사람을 뽑는다 . 그런 지식들이 있는거에요 그런 지식인들은 신분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에 비해 부러우니까 봉건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되죠 . 막말의 정치 사상 까지만 할게요
존왕론 과 양이론이 18세기부터 대두됩니다. 정치적으로 천ㅇ왕을 옹호하겟다는거지 . 흔히 존왕양이 라고 하는ㄷ ㅔ엄밀히 따지면 둘은 달라요 존왕은 천황을 숭상하는거고 양이는 오랑케를 물리친다는 뜻이야 천팔백년대 쯤 돼면 러시아 영국도 들어오고 . 개국을 원하는 다른 나라들이 두려우니까 양이 사상이 나타나고 . 천황을 중심으로 해서 완전히 흐트러진 열도를 휘어잡겠다 뭉치자 하는게 존왕 사상이져
이런것들이 에도 말기나 나타고 있ㅇ습니다.
0321 동양사
외국선박의 등장과 정치권의 혼란. 자 외국 선박이 통상요구가 1853년에 발샌한건 아니고 그전에도 계속 있었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일반은 모두 거절을 합니다. 일본의 큐슈지방 저 남쪽지방의 나가사키라는곳에서 무역을 했잖아요. 모든 통상요구가 오면 모든 배를 나가사키로 보내요. 나가사키가 출입국 사무소야 . 개항의 요구가 있어도 나가사키로 가라 . 나가사키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나가사키에서 정식절차를 밟아라. 라고 이야기해요 . 배들은 일단 나가사키로 가죠. 그래서 나가사키를 가서 거기서 이제 개항을 하자 . 이런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 문서를 에도 막부에 보냅니다. 나가사키에서 동경은 굉장히 멀어요. 가는데 한달 이상은 걸리죠 배로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말을 가지고 가기때문에 거기서 이제 문서를 보고 동경에 있는 막부 중심세력들은 회의를 해요 이거를 가지고 논의를 하겟쬬 그게 한달걸려요
그래서 결과를 줘 또 한달 걸려서 나가사키로가.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사개월 걸려. 그래서 받은 답은 안된다야. 기다리다가 지쳐서 외국배들이 포기하고 갑니다. 때로는 ㅂ가다 열받아서 러시아 함선은 불지르고 간다든지. 일본 병사들을 패고 간다던지 .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게 있을지라도 에도는 쇄국이기 때문에 . 아예 통상 이런건 생각안하고 있어요 그런와주엥 에도 말기가 되서 일본에 온 선박이 1853년에 왔던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함선이에요 증기함선이야. 증기때문에 그을려서 . 거무시리해 .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검은배로 흑선이라고 불러. 페리의 흑선. 일본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아푸튼 페리가 데려온 함선이 천팔백 오십삼년에 와서 동경 가까이 해안에 정박을 하고 일본에게 통상을 요구를 합니다. 개국을 우너합니다. 늘상 그랫듯이 나가사키로 ㅎ가라라고 이야기 하지만. 얘는 안가는거야. 포를 쏘는거야
그러니까 에도는 깜짝 놀라는거야. 굉장히 당황하죠. 그래서 이제 결정을 내릴때는 막부에서 충분히 논의를 한다음에 교토에 천황에게 전달을 하고 교토의 천황이 승인을 하게 하고 . 그러면 공식적 효력이 발생하는거야. 그런데 막부가 페리의 함선이 두렵기 때문에 . 페리를 1년 뒤에 와라 그러고 페리를 내보내
일년뒤에 오면 싸움을 하자라 는 생각으로 있고. 이미 에도막부가 경제력이 굉장히 떨어진상황이에요. 정치적으로 혼란해. 예를 들어 쇼군이 13대 쇼군이 병약해 / . 후사없이 죽었어요 . 당장 쇼군이 될사람을 찾는거지 . 후보감중에 두명이 유력하니까 파가 딱 나눠지는거야 . 정치싸움을 하는거지 . 국방을 해서 대항해야하는데 정치적으로 혼란한거야. 돈도없고. 굉장히 어려움에 처합니다. 겨우 하나의 후보를 선택해서 쇼군을 만들어요 . 이 이에모치가 건장하지도 않고 유약해 . 병이있어 . 근데 쇼군이 됬어 . 반대파였던 요시노부는 예리하교 통찰력도 있고 .통챨력도 있고 . 천재적이야 . 요시노부는 밀렸어 . 반대파들은 요시노부가 무섭잖아 . 그래서 감금시켜버렸어. 요시노부가 감금을 당하니까 요시노부 출신의 미토번에서 암살자들을 보내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해버려. 이렇게 혼란스럽고 이런데 페리가 오니까 에도가 혼란에 빠집니다. 가신들 중에 개항을 하는게 어떻습니까 하는 살마이 생겨 근데 이런건 있을수가 없는일이야. 에도 막부의 위신이 떨어지는거지. 막부의 의견과 다이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대립되져
벌써 쇼군의 입장과 대립되는거 부터가 불충이야 . 그래서 에도막부는 명령체게 전달의 문제에 상처가 나기 시작하고 권위에 상처가 나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막부중심의 이이나오스케라는 가신이 있는데 중심으로 해서 쇼군과 더불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습니다. 이 통상조약이 천황의 재가를 받지않은 막부 스스로의 승인이였다는게 문제에요 . 막부가 결정하더라도 천황에게 승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런절차를 하지 않았다는거죠. 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화친조약을 맺고 54년에 그리고 러시아와도 맺습니다. 막부는 경제력이 없고 정치적으로 어렵기에 개국을 통해 통상하다보면 돈이 좀 생기지 않을까 . 그리고 개국을 통해서 지금보다는 잘먹고 잘살지 않을까라는 꿈을심어주었던 것이조 . 그런데 많은 영주들이 반대를 하는게 문제야. 쇼군 후계자 문제의 대두. 1853년 미국이 통상요구를 해오던 가운데에 13대 쇼군이 죽고 14대 쇼군이 나눠지고 요시노부가 감금을 당하고 하면서 이이나오스케에 의해 화친조약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불만을 품은 영주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 그 이전에는 영주들이 불만을 품을수도 없었다는것이죠
이 영주들이 불만을 품게되자 . 막부의 지식인들 각지역의 지식인들이 천황없이 막부가 화친조약을 맺었다고 해서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는게 여러 사상이 대두돼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는 존왕사상 하나는 양이 사상입니다. 막부가 흔들거리자 더이상은 막부가 중심이 되기 어렵지 안겠느냐는 존왕 사상과 이국 오랑케를 무찌를 양이 사상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존왕과 양이는 다른사상이지만 시기적으로 같이 일어낫엉. 막부는 쇼군을 놔두고 천황을 중심으로 정칠르 개편하고 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을 죽입니다. 안세의 개혁이라고하는데 1858~59년이라고하는 안세의 억압시대가 있습니다. 지식인들 중에 존왕사상을 중심으로 하는사람들중 요시다쇼인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급진적인 사람이 있는데 , 정한론이라던가 다시한번 일본이 존왕사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사람이었는데 . 에도 시대까지 자신의 의견을 펴는 사람이 없었어요 . 이때 보면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사상이 나타나는걸 보면 막부가 힘을 잃었다는거죠 . 요시다 쇼인은 어린나이에 처형을 당하는데 그의 제자중에
이토히로부미에요. 이토는 막부반대에 참가했던 사람이고 오랑케를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사람이에요. 영국 공사관도 불태워 버려 . 시대가 바뀌면서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생각으로 살게 되고 외국에 나가게 도 되고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는거죠. 그래서 화친조약을 맺고 통상조약을 맺게되오 58년에
막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58~59년 활동하게 되고 . 요시노부지역의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번주 요시노부가 감금당하는거에 분개해서 요시노부를 감금한 이이 나오스케등을 암살해버려요 . 정치가 완전히 미궁에 빠지는것이죠 . . 그리고 요시노부는 이제 감금에서 풀려나고 1860년 이후에 정계에 진출해서 병약한 쇼군과 더불어 에도막부를 개혁하는데 일조를하고 . 14대 쇼군이 죽고 1866년에 요시노부가 마지막 쇼군으로 오르게 도비니다. 쇼군에 등극하면서 요시노부는 에도막부가 서양을 배척하는 이런 노선에서 적극적으로 외국자본을 들여와요 . 프랑스 자본으로 공장을 만든다던지 군수산업을 만든ㄴ데 힘을씁니다. 그러나 이미 . 에도 막부 경제가 흔들렸기 때문에 이런 개혁들이 좋지 못합니다. 끝내는 등극한지 1년 만에 막부를 타도하자는 영주들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쇼군직을 천황에게 돌려바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게 대정봉환이라고 하는것이에요.
일본의 상권을 보면 영국에 의해 나가사키 침입사건이 있었고. 영국배가 몰래 들어와서 침범을 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고 1811년에는 러시아의 치시마 즉 러시아 땅까지 올라가는 열도 . 여기에 배가 와서 . 측량하자 이런활동에 에도 막부가 많이 긴장을 하게 되고 . 이 당시 러시아는 서쪽으로 활동하는걸 일본이 알았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해 굉장히 무서워 했어요 . 일본은 홋카이도에 대해서 무시하고 그랬는데 러시아가 요 홋카이도를 틈틈히 와서 관리해주고 홋카이도에게 사이좋게 지내고 이러니까 에도 막부속에서는 홋카이도가 러시아에 넘어가지 않을까 1825년에는 다른나라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이국선타불령을 만들어 버립니다. 페리제독이 나가사키로의 선회를 거부하고 대통령친서를 주었고 페리제독이 처음으로 에도에 상륙을 하짐나. 돌려보내고 육개월만에 오면서 에도막부가 큰 혼란에 빠졋죠 . 9척의 함대와 함께 페리가 왔고 일미 화친조약을 54년에 맺어요 . 이 조약의 내용들은 시노다 이쪾을 개항하고 연료와 물자를 공급하고 자주 관세권을 폐기하고. 최혜국 대우를 하고 . 그니까 미국의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조약 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엇어요 . 일보은 미국하고 만나기 전까지 중화질서속에서의 일원이였어요 조공은 알아도 조공은 몰라 .조약은 어디까지나 근대적 용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약이라는것은 국가와 국가간의 동등한 조약이지요 . 중화질서는 동등한게 아닌 중국을 중심으로한 상하관계지요 . 중심과 주변국 중화 중심과 주변국이라는 관계기 때문에 조약이라는게 처음이에요 . 이렇게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 일본의 불평등 조약으로 경제적 손실을 잃게 되죠 . 미국으로 갈떈 관세가 붙고 미국게 일보으로 올떈 관세가 없어 화가 나져 . 무역의 불균형이 오는거죠. 1855년에는 일러 화친조약을 맺어요 . 한쪽에만 개항하면 ㅎ미이 딸려가니까 다 맺어서 균형을 맺고자 한거죠 . 일본은 이 형태를 조선에 강요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영국 러시아 이런나라들과 조약을 맺어요 . 그거이 바로 일본이 배운점이죠 . 일러 화친죠약에서 스시마 열도에 이건 나중에 북방열도 할떄 다시할껀데 아까 홋카이도 지역의 일본하고 러시아 하고 맺엇던 조약이 시대에 따라바뀌면서 저 영토를 뻇기게 되는데 나중에 할게요. 사할린 지방이라고 햇습니다. 이 지방은 홋카이도와 가까워요 . 홋카이도 위부분 사할린 거기에 일본사람들도 가서 무역도 하고 햇는데 러시아와 국경선을 만드는데 명확히 만들지 않았어요. 일본인돌 사고 러시아도 살고. 나중에 이렇게 허가가 되는데 . 여기에는 소련에 의해 다 쫒겨나죠 . 그렇게 뻇겨요 . 일본은 영토문제가 다 있쬬. 일본 자체가 문제가 많죠 . 1874년도에 사할린에서의 그런걸 뻇기죠 러시아와 국방영토 문제가 남았다는거. 1853년에 54에 화친맺고 58에 통상조약 . 드디어 외국인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죠 대지마가 아니라 외국인 거류지역이 열려있는데 지역에 외국인이 살게되져 1860년대에요 . 에도말기인 이때 1860년대에 에도내에 있던 외국인들은 일본사람들과 부딪혔어요 . 나마모기라는 지역에서의 살인사건이에요. 1862년에 사츠마 번주라고 행진하는데 요꼬하마에 외국인들이 드나들면서 사무라이들과 부딪혔는데 번주 행차행렬이 영국인이 행렬을 둘러싸여서 간거에요. 일반백성이라면 머릴숙였을 텐데 . 외국인들이 말을 타고 행렬속으로 들어오게 된거지 모르는거지 뭔지를. 그러니까 사무라이들이 영국인을 벤거지. 그중에 한명이 살아남아서 . 영국 공사관으로 가서 사건을 알리고
이 책임을 일본에게 지게 하는것이죠 . 이런 책임은 배상금과 연결되어있기에 중요한 껀수가 되는것이죠 . 에도는 손을 뗍니다 . 번주가 병력을 가지고 영국과 전투를 벌여요 사츠에이 전쟁이에요 . 사츠마와 영국이 싸운것 . 나마부기 사건에 대한 영국 요구에 대해 거부하고 전쟁을 치루게 되져 . 일본 열도가 지역별로 나누어진다 할지라도 막부가 나서지 않고 하나의 번이 영국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할수 있느냐 이시대의 막부가 얼마만큼 세력을 잃었고 얼마만큼 불리한 조건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큐슈에서 외국선 발포사건이 이얼나요 1863년에 일어나요 쇼군이 약속을 잘못했어.
화친조약을 맺을때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 쇼군은 이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딱 십년만 관계하곘다고 약속합니다. 조약은 십년이라고 . 그리고 나서 오랑케를 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 1863년 5월 10 이야. 그래서 십년 후가 됬었으나 이들을 쫓아 낼래야 쫓아 낼수가 없어 , 그런데 큐슈에서는 막부가 이 약속을 했다고 해서 그걸 빌미로 큐슈에 정박한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하게 됩니다. 미국과 프랑스가 이 공격을 받게 되요 .
그래서 막부도 곤란해지고 미국과 프랑스가 번주를 통해 배상금을 챙겨가죠 . 이 외국세력과의 교섭이 있게된 10년이 지났으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서 무역거래는 매우 손실을 보게되고 . 개항을 경재 부흥책이라고 했던 막부는 점점더 신뢰를 잃게 되죠 . 불리한 과세도 원인중의 하나였고요 . 불평등 조약은 ㅁㅔ이지 정부까지 이어집니다. 메이지 정부는 불평등 조약을 고칠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11910년까지 안 고쳐집니다. 나중에서야 좀 개정을 합니다. 정치상황으로는 막부가 실추되고 혼란했고 . 통상파와 반통상파로 나누어 졌고 별표 ~!!! 막부주도 안세의 탄압이 일어납니다. @@##$*$* 이토번의 나리야끼라는 살마은 요시노부의 아버지야 . 언제든 쇼군을 낼수 있는 사람, 힘을 가진 사람이에요 . 이사람이 막부에 서 볼떄는 껄끄러운 존재야 . 민중들이 쇼군을 높이 쳐줘야하는데 쇼군이 병약하니까 건강하고 쎈 나리야끼를 좋아했어요 . 그래서 막부에서는 항상 위험했어요 . 그러면서 결국은 나리야끼의 아들인 요시노부를 반대하고 이에모찌를 택했는데 요시노부와 요시노부가 감금당하자 . 사무라이들이 이이나오스케를 죽인거죠. 사쿠라다문외의 변이라고 합니다/.
쿄토 .쿄토는 천황이 있어요 . 천황이 힘이 없어 . 그런데 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천황에 대한 관심이 많이지는 거지. 어차피 막부도 천황이 승인을 해서 움직이는거 아니야 . 종이호랑이라도 천황이 허가를 했던 권한들을 막부가 휘두르는거 아냐 . 에도막부라고 해서 에도지역에 생긴 막부를 칭하는데 . 내가 막부야 천황을 꼬셔서 천황이 에도에 준 권한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주면 내가 쇼군인거야 . 그때 천황은 언제든지 사무라이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할때 손에 넣으려고 하는 권력의 하나에요 . 교토도 막부가 중심을 잡을 때는 상관없는데 . 막부가 흔들리면 사무라이들이 교토의 천황하고 손을 잡으려고 하는 세력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특별히 에도 막부에게 평소에 충성을 다했던 세력들. 에도 막부한테 30평 뜯겼던 세력들. 이런 세력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모이자 하는 이름하야 존왕파다 . 교토를 들락날락 했다는거에요 . 막부가 힘이 없으니까 교토에 대한 감시가 안되잖아 . 그틈을 이용해서 막부 불만세력이 교토를 왓다갓다 하는거죠 . 효명천왕은 솔직히 자기를 비호해주는 세력이 늘어나는건 좋은데 그렇다고 에도 막부를 내칠 마음은 없어요 . 그래서 오히려 존왕파가 자기를 쑤셔도 . 사무라이와 막부의 교섭을 진행해주는 온건파였어요 . 그런데 이 천황이 죽고 중심을 잡던 천황이 죽으니까 양쪽 싸움이 커지는거지.
존왕파 중에 막부를 없에갯다는 세력이 나타나면 천황이 이들을 좀 달래고 막부의 눈치를 보면서 일러바치기도 헀어 . 천황도 살기위해서 . 그런 조정이 효명천황이 죽고음 그렇ㄱ 됫져 . 1864년에 신선조가 이케다야 사건이라고 해서 반막부 사무라이들이 벌였던 싸움이에요 . 막부는 이 사무라이들을 제거하거나
요시노부는 이이나오스케가 암살당하자 다시 정계로 진출합니다. 막부에 대항세력이던 쵸슈번을 공격하고 이 쵸슈번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역활을 합니다. 막부는 요시노부에게 빚을 진거지 . 쵸슈번은 1864년에 한번 졌고 1865년에 다시 결행하게 되는데 66년까지 결행을 해요 요때는 쵸슈번이 이겨버려요 .
왜냐면 막부에 대항하는 번과 밀약을해서 이겨버려요 . 다른번주들은 경제력이 너무 없어 . 다른번주들은 막부가 군대를 동원하라고 하는데 제대로 지키지 않아 . 막부가 힘을 잃어가는거지 . 결국은 쵸슈번이 성공을 합니다. 요시노부는 1866년에 15쇼군으로 등극을 하죠 . 그리고 나름 막부의 마지막 불꽃을 태웁니다 . 1867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등록을 한다던지. 막부의 위치를 강화하려고 하죠 . 쵸수번과 사츠마 번이 동맹을 맺고 요시노부를 압박하는데 . 둘이 합쳐진 군대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 이들이 원했던
대정봉환을 수락을 합니다. 쇼군이 누리던 모든 지휘를 쇼군에게 돌려준다는게 대정봉환이에요.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수락하는데 목적이 있었어요 . 군사적으로 이길수가 없으니 첫번째 . 정권이 천황에게 가봤자 700년동아 ㄴ정치를 안햇기 때문에 정치가 어려울것이라는 예상 . 천황은 자연스럽게 자기에거 손을 내밀것이라는 계산. 그래서 정권을 돌려주게 되져 . 전략적인 후퇴에요 .
하지만 쵸슈번과 사츠마번은 승복하지 않고 막부가 없어야 확신했기때문에 결국에는 막부를 쓰러트리는데에 온 힘을 바칩니다. 그래서 1868년에 두개의 전쟁을 치루면서 막부를 완전히 없애게 되죠 .
0330
무기나 이런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시노부는. 여러가지 개혁안을 놓는데 번번히 실패해 .첫번쨰 돈이 없어 . 더이상 세금걷기가 어려운거야 . 그래서 요시노부의 개혁이 매번 실패한다. 에도 막부는 쵸슈번과 사츠마 번이 동맹해서 정벌에 실패했던 이 막부가 오히려 역습을 당함 . 동맹이 니 권리권한을 돌려 내놓아라 . 대정봉환이다 .
메이지 국가의 출발. 메이지 천황이 즉위를 하고 쵸슈 사츠마 메이지 세그룹이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세계가 여리게 된게 메이지 유신이에요 . 천황을 중심으로 기구개편. 새로운 세상이 됫다고 하면서 말씀을 반포하는데 5개조 서문이건뭐냐며 마치 법과도 같애. 이제 왕조가 국민국가로 근대적으로 바뀌는데 아직 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에요. 헌법은 국민이 중심이 되어서 만들어지는데 . 이거는 근대적인 행위입니다. 왕조에서 헌법은 없어요. 5개조 서문은 메이지가 약속한 하나의 말인데 .. 마치 헌법과 유사한 형태를 띈다. 첫째는 합의 체제이며 단독으로 정치하지 않겠다야. 두번쨰는 관민일치의 국가형성. 관리만이 아니라 백성도 정치하는 국가를 만들겠다. 구관의 타파 . 옛 관습이에요 옜관습은 뭐야 막부의 그늘을 타파하겠다는거다. 부국강병을 하고 식산흥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 자 이렇게 대정봉환. 막부가 가지고 있었떤. 정치의 큰 권력이 천황에게 옴겨지자 . 각 영주들은 쇼군이 그랫듯 자신이 가진 권력과 땅을 천황에게 줍니다 . 이건 판적봉환이에요. 판은 땅 적은 백성. 쇼군을 따라하는것이죠 . 번을 폐지하고.
천황이 지배권을 확립하는거죠 . 번은 폐지되고 현이 설치됩니다. 이게 폐번 치현. 번은 세습으로 갖고 있었던 곳인데 . 이땅을 돌려주고 자기는 동경으로 이사하는거지 . 각 지역에서 에도로 . 다 에도에 집이 있어 .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합니다. 공무원을 파견하겠다는거죠 . 중앙집권적 정치기구를 조성하겠다느거죠. 이렇케 되면 직접 메이지 국가가 세금을 얻을수 있어 . 돈이 있으니까 개혁할 자금이 충당되는거지. 그리고 새롭게 정치기구도 만들어 댑니다. 구교라는것은 구게에서 선출하는건데 귀족중의 하나인. 오랜세월 세습된 귀족들 이들이 막부정치를 잠시 위임받고 . 1869년에는 태정관 신기관 입법부 이런걸 만들어요. 외우지는 말고 . 태정관은 근대적 행정기구 등등. 신기한건 신기관. 제사를 담당하는곳.
근대적인데 제사를 담당하는 신기관이있다는게 신기함. 천황을 중심으로하는 근대 국민국가라는 복합ㄹ적인 일본의 정치형태라고 할수 있어요. 천황은 하나의 하늘에서 내린사람. 하늘에 대한 신앙은 신도가 자리잡아요 신도의 정수리는 천황. 신기관은 신도를 중심으로한 제사기관. 메이지국가는 여러가지 형태적으로는 서양을 따라하지만 신기관을 볼떄 일본의 고유성을 갖고있지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메이지는 의회개설 주장이 많았ㄴ으나 . 실현되지 못함. 잘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법을 만들어야하는데 1868년 ㅏ일본상황이 성숙되지 못했다는거져. 1889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지는게 바로 입법부. 그전까지는 사츠마 죠슈번이 관할 . 사실 얘네가 전 정치기구 전체에 자신들의 인물들을 포진. 그러한 기득권을 갖게 되는거지 창설자니까. 중앙이 변했어. 지방은 어띳나 . 이 지방행정은 69년 판적봉환이후로 이땅들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집니다. 폐번치현 이라고 해서 번을 없애고 현을 두었다. 옛 번 제도 71년에 사라지게됩니다. 그 땅을 다스렸던 번주 다이묘 영주 이사람들은 반발하지 않았느냐 . 반발은 적었따 . 대신 화족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했다. 재산도 주고 벼슬도 주고 했따. 기득권을 주었따 . 류큐도 71년에 류큐번으로 편입을 시켜요 . 왕국을 없애버리고 . 1879년에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시켜 버리미다. 80년 메이지 기구가 안정기에 들어서며 추밀원이 생긴다 . 이걸 만든게 이토히로부미이다. 추밀원은 국회 즉 의회를 만들고자 헀던 준비단계로써 .심의기관으로 만들어짐. 주관자가 이토히로부미 . 추밀원과 그외 입법부의 활등으로 헌법이 완성되는데 이건 나중에. 쉴게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 사회의 변화
신분제도가 없어져요. 에도는 신분제가 강했어요.사무라이 는 굉장히 소수 약 칠프로 나머지는 농민 상인. 천민 이랫져 천민은 사는지역이 제한적이고 그랬다. 무사계급은 메이지가 세워지며 애매한 존재가 된거에요.. 그래서 특별한 사람들은 사족이 되고 . 하급무사들은 평민이 되고. 귀족들 영주들. 이름높은 사찰의 승려중 일부 . 이들은 화족이 되어서 특권층이 됩니다. 이들은 천황이 관리하는 성에서 살고 평민들에게 성을 사용하고 군대도 생긴다. 사무라이들은 성이 있어요. 상인들은 자기들이 돈많아서 짓기도 했어 . 그리고 어디든 이사도 다닐수 있어 거주이전의 자유가 생겨요/ 직업선택의 자유를 허가해따.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 정신을 표방했고 71년에 천민제도를 업애버린다. 72년 호적을 편성해서 . 세금징수와 징병을 위해 이걸 사용한다. 군대때문에 호적을 편성하기도하고 군대는 89년 완성. 지주와 자작농에게 지권을 교부하고 지가의 삼쩜삼프로 내게함. 교육제도는 소학교 설립하고 . 학교가 제정됨. 국가에대한 의식과 자질 을 교육시킴 고등교육은 1877년 제국대학 설립. 와세다 게이오대학 이렇게 개교하게됨. 종교개혁은 복고적 개혁을 단행하게됨. 신불분리령. 신도와 불교를 분리시킴. 메이지때 불교를 외래종교라고 탄압 . 크리스트교는 계속적으로 탄압당했다. 이유는 크리스트교의 평등사상때무네 그렅다. 상명하복이 당연한건데 이들은 그게 아니였다 . 크리스트교는 계속 탄압당했다. 이건 에도때 절정을 이루다가 . 미국을 시작으로한 개강으로 하다 서양세력의 반발등으로 메이지때 탄압을 금지합니다.
1871년 부터 파견한 사절단이 망신당해서 건의한것때문에 탄압을 금지시키게 됩니다. 메이지 국가가 세워졋지만 불안한 시간이 이어짐. 불안한 시간은 20년 갑니다 . 국가제도 마련까지 에도시대에 별 준비가 없었기에 그렇다 . 백성들은 메이지가 생겨도 본인 스스로가 백성인지 알지 국민인지 몰라 . 국민들의 머리를 개혁하고 . 700년 이어진 사무라이 정권을 해체해서 . 새롭게 천황의 왕조가 아닌 서양의 국가라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걸렸다 . 그동안 메이지는 좀 혼란스러웠는데 내전이 그래서 생겼다 .
번벌정치는 메이지 국가 초기의 특색이다. 벌 이라는것은 그들의 세력이다 . 번들 세력으로 정치를 한다
사츠마와 쵸슈 하급무사들이 뭉쳐서 정치세력을 만드는거지 . 그러니 다른 번 출신애들은 화가나지 . 나머지는 화가 . 번벌정치에 대해서 불만이 높아요 . 또다른 한켠에는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돼. 자유민권사상은 정부가 자꾸 번벌정치를 하니까 자꾸 비판해. 그래서 의회도 생기고 헌법도 생깁니다.
민권사상은 단순히 국민들에게 정치참여하게하라는거지만 이제안을 하기까지 뒤에는 번벌정치에 화가난 다른 사무라이들도 있었어요. 이런 자유민권사상이 있고 . 또하나는 정한론도 있고. 한반도를 정벌하자 . 조선왕조와 일본간의 외교적 의례문제부터 시작. 에도 때 쇄국이었죠. 에도때 조선과 무역한 유일한 창구는 대마도였어. 의례라고 하는것은 중요해. 메이지가 대마도르를 거치지 않고 오니까 조선은 몇번 돌려보내요 . 이런 조선을 보고 메이지 정한론자들은 화가나 . 정한론이 대두됨. 1840년 중국은 이미 꺠졋단 말이야. 정한론은 사이고 다카모리야 . 이사람은 메이지성립에 주요한 사람. 사츠마의 무사였어.
사이고는 급격하게 추진하지는 않았아요 . 스스로가 가보려고 합니다. 가서 내가 죽으면 그때 침공해라 .
온건은 아니지만 급직적이지도 않음. 정한론의 주장이나 이런것들이 한편에 있는거죠
73년까지 메이지 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냄. 뭘 모르니까 서양가서 배워오라고 . 이년간 세계의 전세계를 돌면서 . 서양의 제도 문물 이런것들을 흡수합니다. 가서 백구명정도가 가는데 수많은 유학생들을 심어놓고 다음 지역으로 출발합니다. 이들이 5년 7년 뒤에 다시 돌아와서 관료가 되요. 그래서 메이지 정부가 개혁의 급물살을 타는게 이들이 돌아와서의 일이야 . 이들이 떠났잖아 . 정부가 비어있는 상태야. 비어있을때 최고권력은 다카모리가 들ㅇ고있었어. 73년까지 사이고가 천황에게 조선을 치자고 건의 합니다. 천황은 거절. 2년뒤 정부의 수뇌들이 돌아온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연기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자 다시 제의를 합니다. 정부관료들은 철저하게 반대 . 메이지국가가 성장하는데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필요한걸 깨달았기에 정한론은 아니라고함. 내부가 안정되어야 한다는데 관료들의 의견이 일치. 여기에 실망한 사이고는 큐슈로 하야 . 여기서 군사학교를 세웁니다. 이 곳에 번벌정치에 불만있는 사족들이 몰리기 시작하는거죠 . 그리고 사이고와 함꼐 불만세력이 큰 세력으로 커지게 되는것이죠 .
메이지 정부는 이들의 세력에 대해 싫어하겟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들 세력간의 싸움이 일어나서 .
1876년 폐도령이 발표되고 이것을 용납못해서 전쟁이 납니다. 세이난센소 . 서남전쟁. 반정부군은 6개월간 항전하지만. 지게되고
메이지는 천도를 합니다. 충격에 대비해 얼마간은 교토도 에도도 수도역활을 합니다.
천년고도 코토와 오사카 . 오사카의 민심에 큰 우려를 했기때문에 . 그리고 에도의 백성들을 생각해서 둘다 수도로 삼고 . 일반적인 제사는 교토에서 하고 행정은 동경에서 함. 천황이 오사카를 간다던지 교토를 간다던지 천황의 행렬. 여러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달래는데 사용하게 되는거져 .
시험 교육칙어 예상함, 자유민권사상 → 헌법제정까지
0404
신국사상이라고 하는것이 키워드이다. 일본이해에 . 하늘이 내린땅. 누군가 다스리게 하는거지 하늘이. 단군신화 처럼 천황도 하늘이 이사람을 통해서 일본열도를 다스리게하는 사상이 신도에요 . 신도의 정점에는 신국사사으이 정점에는 천황이 있는거싱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부터 1867년까지 열도를 직접 다스리는것은 쇼군이 다스렸어요 천황의 명령을 받은. 천황의 권력이나 이런것들이 백성의 눈에는 금방 가시화 되지 않아요. 내가 하늘을 믿고 신도사상 모든생물에 신이 깃들었다는 이 생각. 그 신의 모든 매개가 천황으로 되어있기때문에 내가 신도를 믿는이상 내가 천왕과 관련이 있어요. 직접적으로 권력인 천황이 나타나지 않지만 일상적속에는 천황이 있지요 . 천황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 나의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고 . 쇼군에게 자신의 모든 권리를 일임하기도 하잖아요. 사무라이들은 정권을 잡을 때에.
세력이 바뀔때도 . 에도는 쇼군의 교체없이 270년간 지속되었따. 고게 중요하다. 천황에 대해 일반 백성은ㅇ별 관심이 없어요. 내 지역의 영주 주군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거고 쇼군은 더 윗선이고 이런상황에서 천황은 나와 먼 거죠. 더군다나 막부는 천황을 꽁꽁숨겨놨어요 .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하고 . 돈도 조금 주고. 항상 교토의천황은 늘 부족한 경제력과 부족한 힘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었죠. 막부가 설정한 다른 후계로 올리기도 했어요. 정통을 무시하고 . 천황은 일반대중에게는 먼 존재였죠 .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천황을 내세웠어요. 이제 천황이다. 쇼군이 아니다 . 천황만이 온전한 군주다 라는것을 메이지 정부가 끊임없이 일반 백성에게 가르치기 시작한게 학교교욱의 중ㅅ힘이었어요. 매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게 천황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있었어요. 일반 백성들 가운데 천황은 신화적인 요소가 많아아요. 성덕태자가 지금의 천황으로 강림했다는식으로 군주보다는 신화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메이지 정부가 천황께서 이제 다스린다. 너희는 일본국의국민이다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일반백성들은 천황에 대해서 만나본적도 없어서 늘 천황은 신앙적인 대상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않았죠 . 이게 한 20년 갑니다. 감무천황의 사진입니다. 첫번쨰죠. 이 천황이라는 이미지가 이런식의 신화속의 이미지 밖에 는 안되는거죠 . 감무천황이다라고 가르치고 그림을 그려서 . 이런일들을 계속적으로 학교교육을 통해서 했다는것이죠. 1888년에 신무천황이라고 하는것과 감무천황이라고 하는것은 고대의 천황이미지 입니다. 재밋는건 81년과 88년 천황의 이미지가 굉장히 달라요 . 81년은 보살님 처럼 그려놨고 .
88년 에는 정복자의 이미지죠 . 점점 천황들을 설명하는데에 7년이 지난다음에는 천황은 군주 정복자국왕 이런 이미지가 굉장히 강했다는것이죠. 천황에 대한 국민통합이라고하는것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중에 하나였다는것이죠 . 메이지 정부가 생각할떄 천황을 어떻게 하면 ㅇ일반인들이 알아먹을수 있을까 .
그게 순행이에요. 천황은 돌아다니기가 어려웠용. 메이지 천황은 정부에 의해서 돌아다니느데 20년에 걸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요. 6번에 걸쳐서 . 각 지역의 관리들ㅇ과 만나고 백성들과 만나고. 이러면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수가 있어요 . 그 지역에 유명한 사람들을 천황에게 소개하겟죠 . 효자 효심 효부 이런사람들 이지역의 오래 살았던 옛 선인들 중에 천황을 위해 일한사람들 . 그렇게 하면 지역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겠죠 관리가. 천황이 온다는것은 관리로하여금 지역을 파악하게하고 . 지역과 천황을 엮는일이 생기는것이죠 . 천황의 순행은 지역통합에 굉장히 유용한 일이엇죠. 이것은 지역통합과 천황제의 가시화를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 지역 분리적 체계였던 에도를 없애고 국민통합의 목표를 가시화 했어요. 국민 통합 !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통해서 얻을수 있는 목적이었다는 것이죠 . 순행지역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모든 지역이에요. 1876년 동북지역과 북해도까지 동북지역은 원전 사고 난곳이에요. 여기가 왜 중요하냐면 이 지방을 중심으로 . 메이지 정부군과 끝까지 싸우어요. 76년에 ㅈ동북지역을 갔다는것은 그들을 내가 품겠다 이런 거에요. 이 동북지역은 이지역은 고대에 오랑캐였는데 에도막부때 동경을 중심으로 해서 흡수가 되죠. 1800년대쯤 커다란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끝까지 에도막부를 위해서 싸웠고 이후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섯쬬. 1876년에 천황이 여기에 갔다는것은 천황이 이곳을 품겟다는 소리였어요 . 지역별 관리를 하고 천황의 이미지를 구축하려했고요 정치질서 확립과 이데올로기적 퍼포먼스를 했어요. 이렇게 순행을 했어요 . 천황은 위엄있는 남성이다. 메이지는 이렇게 하길 원했지만 막상 백성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치적 군주로서 보여주고자 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부처다 보살이다. 미신등등등 계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천황과 국민을 연결시키는것이죠.
메이지 각료들은 대부분 유학을한 사람들인데 기독교와 같이 뭔가 하나로 통일될 정신세계를 만들고 싶어했어요. 신도가 있지만 지역마다 신도의 제례의식이 달라요 . 통합하기도 애매해 . 문제는 불교는 외래종교야. 불교를 취할수도 없어 . 유교도 외래지. 결국은 메이지의 이토히로부미는 천황이야말로 일본국민을 하나로통합할수 있는 정신세계라고 생각했고 천황을 어떻게 이용할까 라고 생각했지. 33분부터 군주로서 이미지가 확립되고 . 천황의 권위가 현세에 내려져있는 신의 아들이다 라는 권위까지 플러스. 천황이 지나간곳들이나 숙박한곳은 축복 이런것들 천황이 만진것들 보존하고 또다른 천황의 신화같은걸 만드는거져. 국가적인 영웅으로 내세우는데 이런 영웅들이 꼭 천황을 위해서 일하는게 아니야 .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때 천황군에 죽었어. 그런데 영웅이 되고 . 아이즈번의 백호대 . 원전사고 난 그지역의 아이즈번 백호대 애들이 천황군과 싸웠음에도 죽었어. 1890년대가 되면 이들이 교과서에 나타나고 국가를 위해서 충성한 어린 소년들로 나타남.
국민도덕 . 가정이라고하는 단위가 건강해야지 그런 건강한 가정이 모여 일본을 이룬다. 천황이 아버지이고 황후가 어머니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잘하듯 국민으로서는 천황에게 잘해야한다. 이게 도덕이고 가족 국가관의 확립을 시켜서 가부장적 시스템을 인식시킴
역사교육을 통해서 천황제를 선전했다. 다른 나라들은 흥망성쇠가 있었다. 그러나 천황은 만세일계의 혈통이라는거지 . 신이 일본 열도를 만들었을때부터 지금까지 천황의 나라가 아닌적이 없다라는거야. 이 이유는 완벽해서 그렇다는거야 문제는 주변의 나라들은 불완전하다고 하는거야 자신들은 완벽하고 다른 나라들은 불완전하고 열등하다는거지. 쟤네들은 열등하다는 차별이 나타나는거고 . 무력 침공이 생기는거에요. 왜냐면 저들은 불완전 하기 때문에 .
오늘의 키워드 .폐번치현 , 교육칙어
메이지 시대의 최 우선 목표는 부국강병이에요 . 세금을 어떻게 걷을까가 관심사였어요. 전에는 봉건제니까. 그래서 초기에는 재정이 빈약해요 . 그래서 오사카의 상인으로부터 돈을 조달받는 정도였어요. 오사카는 일본 최대의 상업 공업지역이에요ㅣ. 오사카는 돈이 많아. 그러다가 1873년 에 지조개정을 통해서 세금을 조달하고 토지 지가의 3%를 받았어요 . 국민 한 사람당 돈을 ㅂ다았고 중앙 정부와 개별간의 직접적 경제관계를 확립했어요. 정부가 산업이 발달하기를 바라는데 농민이 80%란 말이야. 이 사람들이 뭘 해본적이 없단 말이지. 그니까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조세수입의 재원으로 공공사업을 추진해요 . 해운업을 하는데 국가가 돈대고 . 국가가 관리하는 산업을 하는것이죠.
1869년에는 전신망을 설치하고 71년에는 우편업무를 하죠 . 이게 왜 중요하냐면 정보가 빨리 유통이 되는것죠 . 1880년에 화폐를 통일하고 관리에 나서죠 . 철도망이 건설되고 . 사무라이들중 상급자들. 부유한 상인들 이들이 투자해서 주식회사를 만드는데 단 국가가 관리하는걸로. - 청나라꼴 날까봐 외국자본의 유입을 겁냈어. 이때 당시에 중국은 아편전쟁을 두번이나 치뤘고 동강 날때마다 외국 자본 써서 못갚아서 땅으로 주고 그랬지 . 그래서 정부가 적극적 개입해서 민간 투자자들과 사업을 하는것이죠 . 중국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고 정부 추진사업을 확대했죠 . 20개 시험회사가 있고 80년대에 민간인에게 불하를 하고 . 정부주도하에 . 외국인을 고용했는데 이들이 갖고온 기술 정보 . 이런것들이 필요했기에 고용을 했구요 . 지방행정 단위를 처음에는 번이라고 했다가 . 점점점ㅈ머 바뀌어서 현이라고 헀다가 . 폐번치현 @@@@@
백성들은 저항하지 않았느냐 ! 근데 동북은 저항하다 망했고 나머지는 어떗냐 . 나머지는 큰저항은 없엇어. 왜없었냐면 천황의 권위라는게 있는거 같아요. 천황에게 빌렸던 권위를 쇼군이 돌려줬단 말이야 . 원래 주인에게 주었는데 할말이 없는거지. 그리고 영주들은 평민으로 살게 안하고 귀족으로 대우를 해줬거든. 손해볼거 없거든 . 쇼군이 나가자빠졌는데 나머지가 뭐라 할게 있겠어요 . 학교제도는 1872년에 소학교가 시작되었고 모델은 프랑스 . 전국은 8개 단위로 나눠서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 교육칙어를 발령 @@@@@@@@@@@@@@@@ 1890 년에 !!! 국민이 무엇을 배워야하는지에 대한것인데 . 천호아이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도덕을 확립했다는것. 국민의 충효심이 국체의 정화이며 교육의 연원이라는것.유교적인 냄새가 아주 많습니다. 전통적 도덕관을 강조하고 유교나 불교를 부적절 하다고 하지만 전통은 말들어진것. 유교를 부적절하다하지만 연호는 모두 중국 고전에서 따왔다. 전통의 중심은 천황이 중심이어야하는것. 군인 칙유라는것은 교육칙어와 더불어 군인 교육에 쓰임.
교육칙어는 이노우에 코와시가 원안을 작성했지만 입헌주의를 따르면 군주는 국민양심을 간섭안한다고 헀지만 기본적으로 천황을 기본으로 생각해야한다는거죠 .
에도말기 부터 지식인 차이에 다양한 계급에 의한 정치적 담론이 많았다. 솔직히 에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 막부의 정책에 대해 뭐라 하는건 있을수 없는일이야 죽어야해 . 그러나 막부 말기부터는 지식인들 사이에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는것. 사카모토 료마 - 이 사람은 양원제를 제안했고. 하급무사였는데 여러가지 개혁안 . 특히 메이지 정부가 해야할 여러 개혁등이 료마 머리속에서 나왔다.
정부수립이후 5개조 서문 을 통해서 제반 문제는 공론을 통해서 하겠다는걸 발표 .
여러가지 기구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 메이지 시대에는 지식인들도 정치에 참여했다라는거 .
신문이 나타납니다. 첫 형태의 신문은 천황은 공론을 중시하겠다고 했단말이야 근데 메이지 천황을 옹호했던 사츠마와 쵸슈가 정계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 말이지. 있을수 없단말이지 번벌정치잖아 . 국민에게 의견을 묻는다 했으니 민선의원을 뽑게해달라는 목소리가 신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거지.
계목서적이나 지식인이 활동하기 시작했지.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지식인들 이런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여러가지 지식전달을 위해서 애쓰는 교육자들ㅇ도 많이 나왔죠.
자유민권운동 !!! 자료 6번 마지막, 이와쿠라 사절단, 내지잡거
0411 일본
자유민권운동 1874년 부터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는데 오랫동안 벌어졌다는게 중요하고 두번째는 오늘 우리가 배울 헌법등이 만들수 있는 여론 형성이 되었다는게 중요하죠. 이 운동은 헌법을 만들어 달라는건데 . 헌법은 열강으로서 갖추어야할 조건인건데 . 당시의 러시아는 왕정이었기에 헌법이 업어요.
문명국가 가 아닌거에요. 그런식으로 열강의 기준은 헌법이였어요 . 정부 측에서 헌법을 만드는것들을 생각을 해보는거죠. 헌법이라고 하는거으로 국민을 동원할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햇고 . 그러나 각 정치 단체에서는 헌법에 의한 이해가 조금 달라따. 민중입장에서는 나도 참여하고 싶다라는점에서 헌법을 필요로 했다. 즉 헌법은 국민을 위한 헌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번벌정치를 타파하자는게 핵심
애국공당이라는게 있었는데 . 이타마키 다이스케 라는사람이 헌법이라는걸 주장했고 . 다른 사람들도 정치참여 요구를 헌법으로 주장했죠. 헌법에 꼭들어가야하는게 민선의원설립건백서야 . 백성이 선발한 사람이 이 나라를 운영했으면 좋겠다라는거죠. 꼭 들어가야해 . 신문이나 이런것들을 통해서 대중적 정치참여가 나타나는데 200여개의 정치결사가 생겨나요. 헌법 초안서 사의헌밥등을 등장시켰다. 정부는 1890년까지 헌법제정을 약속하는데 그 약속을 지켰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학생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안에 여성이 다섯명 있었는데 아홉살에 공부를해서 돌아오고 츠다 우메코라는 인물. 여자 대학을 설립 후에 공학. 모리 아리노리 ㄹ이런 사람은 영어의 공용화 를 강조하기도 함.
불평등 조약의 개정 노력은 계속해서 이뤄졌다. 1886년에 조금씩 개정되었다. 다자간 회의를 통해서 . 대신 일본 영토를 전면적으로 개방하라 ! 라는것 때문에 내지잡거가 이루어졌다. 내지잡거!!!!!!!!!!! 일본 전지역에 외국인의 거주 및 자유로운 여행과 영업이 가능!! 국수주의자들은 이런 내지잡거를 문제시 했다. 결구은 1894년에 내지잡거를 허용하게된다 일영통상항해조약의 체결로 ! , 일본열도의 반대운동이 심했고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폭탄을 맞기도 헀다.
만국공법 @@@@@@@@@
7번으로 - 일본은 양원제에요 귀족원 중의원. 귀족원은 국민이 뽑는건 아니고 지명이죠. 또하나는 중의원 이거야말로 뽑는거. 선거구가 257 뭐이런건 외울건 아니고 전체의 1/3이 구 사무라이 계급이 뽑힘 사업가, 언론인 , 관료. 등이 뽑힘. 참정권은 여자는 없었고. 납세자인 남자만 뽑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니었고 . 일반적인 선거권은 1925년에 25이세 이상의 남자들이 선거에 참여할수 있다는 법률이 나왔다. 여자는 1946년 되서야 참정권이 주어져 . 이렇게 만들어져서 뽑힌 귀족원과 중의원이 제국의회이다. 천황은 어떻냐 . 이건 이따가하고 . 초기의 의회정치는 민생안정 세금 신설 토지세 의존도를 약화시키고 개별적으로 세금매길 방법을 찾고 . 의원들은 이제 생겼고 장관들을 뽑아야하잖아 . 이들은 내각의 각료라고 표현하는데
정부의 관료들 공무원들 이런 고급공무원들은 천황이 임명. 민권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당도 있고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당도 있고 . 이들이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는것이죠. 처음부터 제국의회가 평온하게 가지 않았다 . 민생안정을 둘러싸고 충돌이 많았다. 내각 기구는 1888년에 추밀원이 생겼다는게 중요해 . 천황의 최고 자문기관 . 이토가 만들었다. 본인이 추밀원장이 된다.
원로들이 있는데 이들은 옛귀족들 이들이 있었죠. 헌법도 마찬가지로 18개월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헌법 조사단을 출발시켜요. 이토히로부미가 유럽에가서 가는데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등등을 갑니다. 이토의 편지.
열강 식민지 정책의 근거가 도니것이 국제법이다. 유럽국가행위에 대한 상호원칙의 원칙이야 .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함. 영토를 규정하는데항목이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공인하는 역활을 하기도 함. 무주지 주인없는 땅.
무주지를 자신들이 평가하는것은 독단으로 성립하는거이고 만국평등의 이상은 비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는 철저한 차별이 기반이라는것이다. 문명국 반문명국 미개국으로 나누는데 . 반문명과 미개국은 국가 주권을 인정해주지 않고 대항이 불가능해진다. 미개국은 무주지로 간주해버린다. 어떻게든간에 헌법을 만들어서 문명국으로써 재 탄생해야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이죠. 그중에 하나가 철저한 천황제 철저한 천황제 우위의 헌법체계를 완성합니다 . 1 조 는 천황이 통치한다 3조는 천황의 신성불가침 . 천황의 서양적 군주이미지를 확립했고 신화적 요소를 추가했다. 삼종의 신기 거울 검 옥 이것을 지칭.
마지막 오늘꺼 - 아시아란 유럽의 동쪽에 펼쳐진 지구상의 지역을 의미. 우랄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 홍해로부터 동쪽의 지역. 유럽인들이 생각한 지역. 아시아 지역내의 지역사람들이 만든 용어가 아니라 유럽사람들이 만든 용어이다. 이러한 경위로 불리어진 아시아는 유럽의 식민화 과정에서 고착되는.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내면화 되는 용어이다
동양이라는 의미 . 동양이라는것은 아시아라는 것보다 전 14세기 중반부터 중국이 기준으로 해서 남쪽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갈떄에 닿는 해양 전체를 동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동양이라는 에도시기 서양의 대치된 의미로 사용. 일본에서 동양이라는것은 서양과의 대응관계에서 성립된다. 동양 도덕 철학 문학 등등 . 가치적 명사로 사용된다. 지리보다는 .
이런 용어들이 아시아인 스스로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용어들이 점차 내면화 됨
아시아 주의라는것은 서구열강의 위협을 배제하고 아시아가 연대해야한다. 라는 뜻 중국의 쑨원도 아시아주의를 주장. 1880년 일본에서 흥아회가 성립되고 김옥균도 들어가기도 했다. 1894년 에서 시작해서 1895년 끝난 청일전쟁 이후로 아시아 연대는 퇴색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후 일본의 맹주의식의 나타난다. 이게 점점 퇴색해서 대동아 공영권이 나타난다.
중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1939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56년에 일어난 2차에서 조차 중국이 패배하자 일본사회는 충격에 휩싸이고 1884년에 청불전쟁에서 지자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라는 의식에서 탈피하였따. 그러면서 유교적 도덕관과 덕치에 대한 회의와 실망이 가중되었고 현실적 서양의 사상적 구도가 형성되었고 세계질서변화에 일본이 대응해야한다는 논의가 증가했다. 1870년대까지도 세계의 흐름을 타지못하는걸로 패전의 원인을 찾았다. 게다가 중국의 오만한 행동은 일본의 중국인식에 안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 사건은 이른바 1874년 대만 출병이라고 부르는 사건인데 . 오키나와의 어부들이 대만으로 표류하였는데 대만원주민에게 살해당하였다. 일본정부는 청에게 배상금을 요구하자 청은 대만은 자기 땅이 아니라고 발뺌하나 1874년에 일본이 대만출병을 통해서 군대를 보내 상륙하자 청은 일본과 협정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때 배상금을 주며 사용한 무휼금이라는 단어로 인해 일본에서의 중국의 인식은 더욱 오래되고 오만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무휼금은 불쌍해서 도와주는 돈이라느느뜻이다.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중국세력 때문에서라도 중국을 미워한다. 중국은 여전히 조선에 대해서 종주국 행세를 한다. 그러면서 일본이 중국을 미워하는것에 대한 이유들이다.
친중국 , 친 아시아 사사의 대두 - ㅇ중국 멸시및 조선 멸시에 대한 비판론이 나왔다 그 이유는 서양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싸다 .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 - 일본 은 ㅅ스ㅡ로 섬나라다 라는 인식이 강하다. 소국 섬나라. 하지만 국제법을 의지하면 우리도 불리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어 그러나 만국공법은 서양의 이해를 대변한 법이었다 . 16세기 이후에 각 국가가 국가행위에 대한 상호 우너칙을 규정한 법이고 1864년에 청에서 번역이 된다. 무주지는 누가 무주지를 정의 하느냐 서양세력이 한다 . 뭐 이런거 .
고고학개론 - 단어 정리 (0) | 2018.04.19 |
---|---|
족보로 역사읽기 - 중간고사 / 국민대 (0) | 2018.04.19 |
사회과 수업연구 지도안 - 세계사영역 / ... (0) | 2018.04.19 |
타산지석의 영웅/ 위안 스카이.원세개 (0) | 2018.04.19 |
족보로 우리 역사 읽기 - 과제 /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2) | 2018.04.19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