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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로 우리 역사 읽기 - 과제 /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정신분열초기/역사자료저장소

by 에이구몬 2018. 4. 1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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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로 우리 역사 읽기 - 과제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목차


  1.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2. 족보 추적기

  3. 족보를 따라 역사 읽기

  4. 가족이라는 이름의 기억





  1.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



“예전에는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  할아버지 이름도 기억이 안나네….

이런건 큰아버지가 다 도맡아서 하셨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줄은 몰랐지

아빠는 이제 기억이 안난다. 항렬자도 너 아들 세대에서 태를 쓴다는것 밖에는 몰라”




아버지는 2남 5녀, 7남매 중 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산 29-1. 아버지가 기억하는 얼마 안되는 기억의 파편 중의 하나는 자신의  고향 집 주소일 것이다.

내가 사학과에 들어가고 내 스스로에 대한 뿌리를 여쭐때마다 아버지께선 그것에 대한 답변을 속 시원히 해주지 못하셨다. 1991년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큰 형, 내게는 큰아버지의 교통사고는 아버지로 하여금 기억의 끈을 잊어버리게 하였다. 아버지는 항상 내게 우리는 금녕김씨 충정공파 이며 자신은 33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큰아버지에게 더 많은걸 들었지만 그때는 너무 어리고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자신이 기억하지 않아도 형이 있었기에 굳이 외우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만 말씀하셨다.

큰아버지는 7남매중 둘째로 , 그 당시만 해도 맏이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로 부터 집안의 가계에 관한 여러가지를 배우셨다고 한다. 그 당시 그곳에 모여 살던 친척들의 계보에 대해서 다 외우고 계셨고 자식관계 혼인 관계에 대해서도 집안의 맏이는 알고 있어야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알고 계셨다고 한다.

당시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일대에는  나의 증조부의 아들 3형제가 살고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그 중 둘째셨다.  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으시고 계속해서 교류 하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따라서 큰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댁에 다녀왔던걸 기억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우리 집안의 가계는 여기까지이다. 큰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서 공무원이 되시고 아버지도 전역 후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되고 빨랐으며 80년대의 격동은 어느새 아버지를 중년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슷한 시기 큰 할아버지 댁의 자제들과 작은 할아버지댁 자제들 역시 서울로 상경했다는 이야기만 시골에 내려갈때 가끔 전해 들었다. 오늘에 들어 아버지가 추억하는 과거는 문자로는 형용해 내지 못하는 조각난 모습으로 남아 아버지의 머릿 속 에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모습들, 문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기억을 따라 나의 뿌리를 찾아보는 여행을 떠나려 한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포면에 이제는 친척이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의 누이들 또한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아버지는 홀홀단신 외로이 떠 있는 섬과 같아 보인다. 몇 해 전엔가 작은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오셔서 병원으로 뵈러 간 기억은 있지만 이제는 그때 받았던 연락처조차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시간은 무엇이든 붙잡아 두기엔 너무나 빠른가 보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을 최대한이나 찾아보려한다. 아버지께선 족보가 있었고 작은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것을 기억하셨는데 만일 우리 집안이 기록이 되어있다면 아마도 아버지 기억 속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름을 아버지께선 기억해 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세대 +3


                      증조 할아버지


                


         

                                                                                                

          큰 할아버지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김 귀재 [1926~1997]

            

                                                                                                 

                     

                                                  

          큰 아버지                    아버지

      김 양규 [1947~1991]      김 락규 [1958~ ]


              ↓                          ↓


                                                                      

          김 정진  김 영진 김 정훈  (나) 김 태현

나의 세대 +2

나의 세대 +1

나의 세대


[표 1. 부모님으로 부터 나온 정보만으로 구성한 부계 구성]








  1. 족보 추적記


아버지께선 우리의 본관이 어디냐는 나의 질문에 항상 금녕김씨 충정공파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자신이 33세손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증빙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버지께선 작은 할아버지가 족보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지만 현재 작은 할아버지댁 친척들과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으므로  족보 도서관과 인터넷 자료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4월 22일 정독도서관의 족보 자료실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김녕김씨 충정공파 세보를 찾아 찾아보기 시작했다. 충정공파 세보는 다른 김녕김씨 파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작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타 파들의 세보가 책장 가득히 채워져 있는 반면에 충정공파 세보는 사서에게 말해야만 가져다 볼 수 있는 수장고 속 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충정공파 세보를 열어볼 수 있었다.

[사진 1. 김녕김씨 충정공파 세보]


힘들게 펴볼 수 있었던 충정공파 세보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첫째로는 충정공파 33세손은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갖고 계셨던 자신의 집안에 대한 단서인데 아버지대의 돌림자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규(圭)자를 돌림자로 쓰셨는데, 이는 김녕김씨 충정공파의 항렬자에는 나타나지 않는 돌림자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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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충정공파 33세 부분의 항렬자 확인]


아버지의 ‘규’자가 나타나야 할곳에는 ‘배’와 ’진’만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이후에 나올  [표2]에서의 배(培)자와 같은 것으로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던 충정공파라는 정보가 틀린 것임을 확인하였다.

조사한 바에 따른 충정공파의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상相

병秉

섭燮

환煥

철喆

기基

종鐘

호鎬

수洙

순淳

식植

동東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형炯

남南

배培

균均

용鎔

석錫

호浩

연淵

영營

주柱

열列

희熙

[표 2. 충정공파 돌림자 ]


아버지께선 당신이 충정공파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계셨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려드리니 굉장히 당황하셨다. 그리곤 말씀하시기를 틀림없이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규’자를 돌림자로 사용하였고, 큰아버지의 두 아들 또한 이름을 지을때  ‘진’을 사용해 지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에서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는 ‘충정공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항렬의 돌림자 ‘규’ 와 다음 항렬의  돌림자 ‘진’ 이 일치하는 김녕김씨의 파를 찾기 위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던 도중 김녕김씨의 모든 파들의 항렬표를 모아둔 성씨정보 홈페이지를 발견해

이를 활용하여 찾아보았다. 그중 충의공파 의 항렬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아래의 항렬표를 근거로 아버지께서 충정공과 충의공을 착각하고 계신게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하게되었다.


[사진 3. 충의공파 항렬표 ]


충의공파 항렬표를 보게되면 26세에 ‘규’는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항렬자와 일치하고 27세의 ‘진’은 큰아버지의 두 아들인 정진, 영진 형제의 돌림자와 일치한다. 또한 아버지께서 한 가지 더 알고 계셨던 사실은 내 아들 세대에서 ‘태’자 돌림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충의공파 항렬표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아버지와 나의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의 항렬자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안은 충정공파가 아닌 충의공파라고 결론지었다.

집안의 맏이셨던 큰아버지가 뜻밖의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면서 집안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들이 전해지지 못했다. 아버지께선 파(派)를 착각하고 계셨고 친척형들은 그 당시 중학생, 초등학생 이였기에 정확한 것들은 배우지 못하였다. 구전에 의한 전승이 가지는 취약점을 여실히 드러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집안이 충정공파가 아닌 충의공파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고향에 있던 친척들도 뿔뿔히 흩어져 누구 하나 물어볼 사람도 남지 않았고 누이들은 관심이 없던 일이여서 이제는 완전히 기억 전승이 단절되었다.

더 이상 추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족보 추적記는 여기에서 마치게 되지만 언젠가 다시금 새로운 단서가 나온다면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


3. 족보를 따라 역사 읽기


  1. 할아버지의 이야기


내가 집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아버지는 사실 기억하고 계신것이  많지 않다. 내게 증조부이신 분의 성함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고 차남이셨던 탓에 장남이 지녔던 ‘기억의 의무’에서 빗겨나 있었던 탓도 크다. 그러나 아버지가 증조부께 대하여 어릴 때 부터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게 바로 땅에 관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길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사꾼 집안이다. 여 남포에서 농사 오래 지은 사람들은 많아도 우리 식구들 만큼 오래 농사지어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증조부)도 대대로 농사를 지으셨고 우리 지금 부치는 땅도 아버지가 다 마련 해놓으신거라. 아버지가 삼 형제 앞에 땅 하나씩 해주신다고 쎄꼴이 싹 다 빠지셨다.’


증조부께서는 그 당시의 자작농이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 할아버지께서 1900년 즈음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때 어느 정도 땅을 가지신 자작농이셨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조 할아버지는 3형제를 두셨고, 아버지를 따라서 농사를 짓는 3형제에 골고루 땅을 나누어 주셨다.

나의 할아버지께선 3형제 중의 둘째로 저수지 안쪽의 큰 땅을 물려받은 큰 형과는 달리 저수지 쪽 땅을 물려받았다. 예전에 내가 초등학생 일때 친가에 내려가서 놀 때 할아버지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저기에 있는 저수지는 옛날에는 그렇게 안 컸는데 왜정때 크게 만든다고 이렇게 해놔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 너도 조심해야 된다. 느이 아빠도 어릴 때 저기 빠져서 죽을 뻔 했어.저기엔 가까이 가지 마라 ’  


할아버지께서 가지신 땅에는 큰 저수지가 붙어있는데 지금의 ‘남포 저수지’ 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저수지가 크게 정비된 때를 자신이 어릴 적이라고 기억하셨다. 아주 어릴 적 기억하기로는 저수지는 큰 편이 아니여서 지금 물에 잠긴 곳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셨다.아마  그 당시의 상황이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했던 산미증식계획이 아닐까 추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일어난 1918년 쌀 폭동을 계기로 자국에 안정적으로 미곡을 공급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전국에 설치된 수리 조합은 산미증식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설치된 것인데, 전국에서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저수지등을 개량하는등의 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남포 저수지가 갑자기 커진 이유도 당시에 수리 조합이 생겨서 남포 저수지를 크게 만든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920년대라는 연도도 비슷하고 내가 할아버지께 직접 들은 것이라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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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남포 저수지와 할아버지 댁]

할아버지는 증조부께 받은 논과 함께 평생을 농사 지으셨다. 스스로도 이 땅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죽어도 이 땅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사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선 23년에 태어나셨으므로 일제 강점기일 때인데 그때를 왜정으로 기억하실뿐 크게 나쁜 기억은 없다고 하셨다. 어릴적 순사에게 맞아 생긴 상처가 팔뚝에 남아있다는걸 이야기 하신적도 있지만 스스로도 순사에게 맞은것인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너무 어릴때라 자신도 전해들었다고. 다만 공출에 대한 것은 굉장히 안 좋게 말씀하셨다고 아버지께서 기억해주셨다. 막내였던 아버지가 어릴 적 투정이라도 부릴라 치면 할아버지께선 공출로 먹고 살기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아들놈까지 날 잡아먹는다면서 이야기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는 ‘각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해방 이후에 태어난 아버지에게도 이 ‘각출’에 관한 것은 많이 이야기 했다고 기억하셨다.

1940년대 들어서 공출로 집집마다 내야 할 곡식도 많고 세금도 많아져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했다. 이때 부터 할아버지는 결혼을 해서 따로 분가하셨기에 더욱 곤궁하게 지냈다고 하셨다. 이때 즈음해서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던 논을 빼앗기게 되는데 어디에 빼앗기게 되고 이런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소작농이 된다. 아버지께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세금을 못 내서 땅을 팔아서 무언가 대신 냈다고 이야기 들었다고 하셨다. 농사를 하는 땅과 농사를 짓는 사람은 동일한데 그저 땅 주인만 바뀐 상태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땅 주인이 바뀌었지만 할아버지는 경작권을 인정받아서 소작농으로서 그 땅을 계속 경작하실 수 있으셨다. 각종 세금과 공출로 파묻혀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할아버지에게 광복은 ‘내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로 다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되찾지는 못했다. 일본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한국인 지주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땅으로 할아버지의 땅은 편입 되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미 군정 3년 동안도 내 땅이지만 내 땅이 아닌 곳에서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하던 할아버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농지 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자신의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농지 개혁은 유상 매입과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해서 1가구당 3정보 정도를 소유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이때야 비로소 땅을 되찾을 수 있었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자작농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6.25 전쟁은 땅을 찾은 기쁨도 잠시 다시금 할아버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전쟁이 터진 1950년 여름의 상황은 할아버지에게 인생의 큰 고비였다. 당시 고모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 할머니께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논에는 모가 이제야 올라오기 시작한 터였다.  갓난쟁이 아들은 겨우 걸음마를 뗀 터였다. 4명의 가족 중 피난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할아버지는 피난을 포기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던 작은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전라도 쪽으로 피난을 가셨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저 농사꾼일 뿐인데 나를 어찌하겠냐는 생각으로 고향에 남으셨고 계속해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가족들이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은 농사 밖에 없었고 할아버지는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충실 하셨다.  1953년 전쟁이 멈출 때까지 할아버지는 놀라우리 만치 별 탈 없이 농사를 이어 가셨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58년 아버지가 태어났다.



  2) 아버지의 학생시절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36세에 얻은 귀한 막둥이였다. 7남매의 막내로 아들을 원하던 그때의 관습에 따라 정말 귀하게 얻은 아들이였다. 할아버지는 맏이인 큰아버지는 중학교를 다니게 하셨으나 고모들에게 까지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셨다. 고모들은 농사일을 거들거나 밭일을 거들었다. 정말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했던 때라고 기억하셨다. 고모들까지는 모두 학교에 보내지 못했지만 아버지 만큼은 막내이고 남자여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누이들은 가보지 못한 읍내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 큰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무원이 되셨다고 했다. 열살 언저리 무렵에 큰 형이 집을 떠나던 날을 아버지는 생생히 기억하셨다.


‘큰 형이 서울로 올라간다고, 부임한다고 그러는거야.  그때가 중학교 다닐 때 같은데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걸어서 한 시간이 걸려, 중학교는  산 반대편 쪽에 있어서 멀리 돌아 가야 했거든, 그 신작로 따라서 쭉 오는데 형이 나를 안보고 먼저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죽자사자 뛰어갔어. 지금이야 서울까지 금방이지만 그때는 정말 영영 가버리는 것처럼 생각될 만큼 멀었거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서울로 떠나는 형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만 큰아버지와 시내에 나가서 배웅을 했다고 했다. 형을 떠나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있으니 집안이 다 허전했다라고 말씀하셨다. 큰 형이 서울로 떠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는 1980년 군에 입대하게 된다. 큰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지 않아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처음이였는데 할머니와 누이들의 걱정이 굉장히 컸다고 한다.



3)  아버지의 80년대


1980년에 군에 입대하게 된 아버지는 광주의 기계화 학교를 거쳐서 전차부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상병까지 복무를 마친 뒤 곧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게 된다.

아버지는 1980년에 입대하여 1981년에 삼청교육대에 조교로서 전출가게 된다. 삼청교육대는 당시 쿠테타를 일으킨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조종,통제하기 위해서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설치한것이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 특별조치 19호에 따른 삼청 5호 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이다.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대상자에는 학생과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체 피검자의 ⅓ 이상이 무고한 일반인 이었다. 삼청 5호 계획은  전과자와 폭력배들의 목록을 전국 각지의 파출소와 경찰서들에게 배부하고 2만여명이 되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이 검거가 진행되었다. 이때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되어서 군경이 합동으로 체포한 시민의 수는 6만명을 넘었다.시민들은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B급 범죄자로 낙인찍혀 검거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두환을 비방한 사람은 가차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 갔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조교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약 1년간 근무하고 전역하셨다 . 이곳에서는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교관들의 말에 따라서 사람들을 때려야했고  괴롭혀야 했다고 말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셨다. 스스로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 하실 정도이다.

군대를 전역한 이 후에 아버지께서는 큰 형을 따라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가 1984년 겨울이라고 말하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계속 곁에 있길 원하셨지만 아버지는 군대에서 배운 자동차 정비 기술을 활용하길 원하셨다. 서울로 상경한 아버지는 처음에는 자동차 정비를 통해 직장을 잡으셨다.

상경 직후에는 은평구의 형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지냈지만 곧 독립하셨다. 87년경에 아버지의 집을 노원구에 마련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혼자 지냈다고 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는데 쉬는 날에 혼자 집에 누워서 본 기억이 있다고 이야기 하셨다. 9월에도 불구하고 꽤 더운 날이었는데 유도선수가 메달 따던 장면이 기억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80년대는 너무나도 외롭고 홀로 지낸 시간이 많은 날들이었다.

아버지는 정비 기술로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 하셨지만 곧 다른 직업을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당시 정비기술자가 넘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셨다고 한다.   곧 도정 기술을 배우시고 마장동 인근에서 일을 하시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온 뒤 10년간 아버지는 일만 하셨다고 했다. 지금도 말씀하시길 ‘그냥 일만했다’ 라고 말하신다. 86년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민당의 농성이라던가, 87년 호헌조치, 88년 서울 올림픽도 아버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나오는 노래 가사처럼 혼자 땀내나게 일해 돈과 쌀은 많았지만 나눌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4) 그리고 그 다음


이제는 그나마 기억나는 것 들은 91년도에 어머니를 만난 것, 그리고 내가 태어난 92년이 기억나고, 동생이 태어난 94년이 기억난다고 하셨다. 그리고 2002년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당시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들썩 할때인데 아버지의 기억은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2002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하고 계셨다. IMF 때보다 2002년이 더 힘든 년도였다고 하시는걸 보니 여러모로 기억에 많이 남으셨나 보다.

 그리고 너희 둘 키우다 보니 어느새 환갑이 돌아왔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다른데 신경을 별로 못썼다고 말했다. 사는게 바빠서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함께한 땅이라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이제 돌아갈 고향도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한편으로는 아쉽다고도 말씀하셨다. 떠나온 곳은 있는데 돌아갈 곳은 없다는건 꽤나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가끔 아버지가 살던 남포 저수지는 들리지만 우리 가족이 들어갈 따뜻한 집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우리는 저수지를 배회하다 돌아갈 뿐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97년 아버지께선 그날에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께선 평생을 지내신 남포를 떠나 서울의 우리 집에서 여생을 함께하셨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사그러들기도 전에 할머니께선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함께하셨던 땅은 자연스레 아버지에게 상속되었다. 아버지는 쉽게 그 땅을 팔지 못했다. 그 땅이 가졌던 의미와 할아버지가 평소 어떤 생각으로 그곳을 대했는지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리라. 서울에서의 생업이 있던 터라 논은  함께 농사를 짓던 주변 분들에게 임대했다. 그러나 곧 땅은 농사를 지으시던 분들에게 매매하게 된다. 농사를 짓지 않지만 땅을 소유한다는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그것이 ‘별로’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가는게 맞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최소 백년간 우리 집안과 함께한 논은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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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부동산 매매계약서]




4. 가족이라는 이름의 기억


고조부와 증조부,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충청남도 남포에 사셨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인척들 또한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큰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던 때 즉, 산업화의 바람에 따라 모두들 서울에 올라오면서 다들 연락이 끊어졌다. 예전 처럼 한곳에 머물러 사는게 아니라 전세면 전세 , 월세면 월세 , 남의 집 살이에 고달파 서로를 생각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가 일하는 가게에 자주 찾아오던 손님이 중학교 때 동창이였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아버지와 겨우 5분 거리에 살면서 누군지도 모르는채 10년 넘게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시골에 살던 사람이 이제는 모두 서울에 모여 살지만 바뀐건 누가 어딨는지 모르게 된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재미있는 일이다. 남포에서 살았다면 분명 인사하고 지냈을 친척이 서울에서는 아무리 가깝게 살아도 모를게 된것이다.  아버지는 최소 6대조 까지는 보령 일대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랜시간 동안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살아왔다면서, 윗 마을과 아랫 마을에 친척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먼 친척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모여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보령 읍성쪽에 가면 증조부의 형제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는데 어릴 적에 한번 인사를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예전 보령 읍성의 성벽이 남아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이 읍성에서 증조 할아버지가 올라가 놀았다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고 말하셨다.DSC02142.jpg

[사진 6. 보령 읍성 성벽]


이제는 성벽 사이로 ‘신작로’가 나고 주변에 사람도 살지 않지만 예전에는 모두가 이 읍성을 쳐다보면서 함께 했다고 생각하니 그저 신기했다. 나와 핏줄을 같이하던 그 사람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나처럼 이 읍성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모든게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져가는 이 시간에 그것은 너무 큰 기대라고 생각한다. 허물어져가는 성벽이 어째서인지 안타까웠다.

대천에 내려간 김에 우리 가족을 100년 가까이 부양해준 할아버지의 논을 방문했다.  논을 보는데 굉장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 땅이 없었다면 있지도 못 했을게 아닌가. 신기했다. 100년 넘게 우리 가족과 함께한 땅이라는 존재가.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무엇 하나 특별할게 없었다. 내가 아버지의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보고 찾아온게 아니라면 어디에나 널려있는 그런 논이였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도 특별한 땅임을 자각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의미를 몰랐던 어제와는 달리  나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외지인이 논에 들어와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으니 주변을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무슨 일로 왔냐며 궁금해 하셨다. 이곳에서 할아버지께서 대대로 농사지으신 땅이라고 말씀드리니 단박에 ‘한씨네’ 손주라면서 할머니를 기억해 내셨다. ‘한덕점’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의 존함이다. 지나던 어르신 께서는  논이 옆에 붙어있어서 할머니와 알고 계시던 사이시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와도 알고 지내시던 사이시라고.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오며가며 인사하시던 기억이 남았다고 말하셨는데 그게 벌써 20년 이나 지났다고 말하시는게 무엇인가 내게 안타까운 느낌을 남겼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내게는 너무나 생소했다. 서울로 올라온 할머니는 철저한 ‘외지인’이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의 삶은 손주가 돌아오기 전, 아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오로지 홀로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친구가 없는 줄 알았던 철부지 손자는 이렇게 한번 더 할머니를 기억하고 간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그리고 우리가족과 한 세기를 함께한 논 사진을 마지막으로 증조부부터 이어온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증조부와 할아버지, 아버지가 함께한 백년 남짓한 시간은  나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억하듯 나의 자손도 나를 기억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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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충남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309]







<참고 자료>

金寧金氏忠貞公派世譜, 발행처 불명, 2000

金寧金氏忠毅公派 家乘,, 김희진, 1997




<참고인>

김 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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