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숙,예종대 여진정벌과 조선 태종대 여진정벌 비교연구
1. 머리말
2. 대여진인식 비교
3. 여진정벌 추진의 목적 비교
4. 정벌군 비교
5. 여진정벌시 대외관계 비교
6. 여진정벌의 결과와 영향 비교
7. 결론
1. 머리말
한국사에서 여진정벌에 대한 연구는 고려 숙,예종대의 여진정벌에 그 초점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조선 초기의 여진정벌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조선초기의 여진정벌은 고려대에 비해 지속적이고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음에도 그 관심도가 고려대에 비해서 현저히 적다. 또한 고려대의 여진정벌과 조선대의 여진정벌에 대한 각각의 논문이 있을 뿐 이에 대한 비교연구가 전무한 상황이다. 이에 부족하나마 이 둘에 대한 비교연구를 제시하고 오늘날의 국경선 선정에 두 여진정벌이 기여한 바를 서술하고자 한다. 12세기 초반 고려의 정벌과 15세기의 조선의 정벌은 3세기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진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진이라는 부족뿐 아니라 당대의 대외관계까지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각각의 정벌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정벌이라는 이름이 쓰인 만큼 군사적인 면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병력의 구성과 전략적인 면에 대해 비중을 두고 고려와 조선에 대해서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2. 대여진 인식 비교
고려의 대여진 인식
11세기까지 여진족은 부족을 기본 단위로 하는 유목민족이였다. 그러므로 병종은 물론 전략 전술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고려군이 여진족을 격퇴할 때는 선봉 정찰대이 정보를 토대로 군사를 매복하거나, 적의 퇴로에 대기하였다가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완안부 추장 유야소가 주변 부족을 통합하면서 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여진의 내부적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종래대로의 인식에 따라 여진을 과소평가하였다. 여진에 대한 과소평가는 곧 정주정 전투의 커다란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2월에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처음에 내 시 임언이 출병의 논의를 주장하였다. 직사관 이영이 말하기를, “무기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니, 망동함이 옳지않다. 그런데 임언이 무사할때 군사를 일으켜 틈을 내려함은 심히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듣지 않았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대부분이 죽었다.
이여진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크게 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가 말해 주듯 고려군은 여진군을 과소평가 기사는 동북면 병마사 임간이 여진군을 과소평가하고 훈련되지 않은 고려군을 이끌고 했기에 고려군을 험지에서 평지로 이끌어 내려는 여진군 선봉의 유인책에 말려들고 말았고 이는 곧 대패로 이어지게 된다. 임간의 패배 이전까지의 고려의 대여진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임간의 정주성 전투 패배이후 임간은 곧 동북병마사에서 파직되고 윤관으로 하여금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윤관은 완안부에 의해 통합된 여진의 힘을 꿰뚫어 보고 일련의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짓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다. 윤관은 고려정부에 건의하여 별무반을 창설하고 여진의 기병에 대항할 고려의 기병을 길러낸다. 정주성 전투이후 여진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더 이상 종전의 인식과는 같을 수 없었다. 통합된 여진은 강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군의 주력인 보병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여진 인식도 과소평가가 아닌 현실적인 정도로 바뀌어갔다.
조선의 대여진 인식
조선은 여진과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이 지역은 고려시대 부터 여진인이 산거하던 곳 이었다.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가 이 지역의 천호로 있었고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의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은 이 지역의 여진인과 매우 친밀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그 지역 특유의 사회구조를 적절히 활용하여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여진인이 포함된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정부의 왜구소탕에 참가함으로써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닦을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조선의 건국에 이지란과 같은 여진출신 수하들의 공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태조는 여진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하였다. 이는 세대를 넘겨 태종대에도 여진과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태종 전반기의 대여진 인식은 여진인은 조선인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명의 영락제가 동북면의 여진인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여진에 취한 행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403년 영락제가 여진인들을 회유하려하자 이에 조선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조정에서 의논을 하였다. 이때 회의 참가자들은 회유대상인 여진이 원래 조선에 속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의 회유에 응한 여진이 나타난 1405년을 기점으로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된다. 명에 입조한 여진이 나타나자 조선은 여진과의 무역소를 폐지하여 여진에 대해서 경제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1406년 김문래 등이 생활의 직접적인 곤궁을 이유로 경원을 침략해오자 태조대부터 우호적이던 여진관계는 침략과 방어라는 관계로 급히 전환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이전과 달리 여진인들을 불신하며 이들을 도적으로 보는 인식이 생겨 났고 이는 제 1차 여진정벌을 통해서 심화되었다.
3. 여진정벌 추진의 목적 비교
고려의 여진정벌 추진의 목적
대외적으로 고려에서는 여진족에 대하여 은위병용 정책을 통해서 고려에게 의탁하거나 귀순하려는 여진족은 회유를 하고, 고려의 변경을 침탈하는 여진족에게는 무력을 사용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고려의 두가지 정책중 특이한 것은 은혜를 베푸는 부분이다. 고려는 민호에 편입시킨 여진족들에게는 고려 내지로 이동시켜서 분산시켜 살게하거나 변방에 공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이들은 자원을 통해 고려의 군인이 되어서 변방의 방위임무를 맡거나 특수한 기술이 있는자는 공인으로 살게 했다. 또한 귀순해 오는 여진의 부족장들에게는 지위와 세력을 가려서 관작을 수여하였다. 이렇게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후한 정책이 이어지자 문종대에는 여진의 세력들이 앞다투어서 고려에 복속하기를 원했다.
“동북 변강 15개 주 바깥에 있는 번인(蕃人)들이 계속 귀순하여 와서 군, 현을 설치하여 달라는 요청이 지금까지도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감화시켰던 덕택이다. 재상들로 하여금 종묘 사직에 이 사유를 먼저 고하게 하고 원근 번인들이 완전히 귀순하기를 기다려서 주, 현들을 획정한 뒤에는 종묘와 사직에 내가 친히 감사를 드리려고 한다.”
여진족은 고려를 통해서 선진문물을 얻고 고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하려는 것이었고, 고려는 귀순해 오는 여진족들을 편입시켜서 그들로써 고려의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중 완안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일대에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완안부는 계속 세력을 확장시켜서 숙종8년(1103)에는 고려 정부와 함흥평야의 관할권 문제로 고려 정부와 무력충돌을 일으키고 고려로 귀순하는 여진족들을 기병으로 쫒아 국경에까지 출몰하면서 고려는 대책을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목적 이외에도 대내적으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실추된 왕조의 위신을 회복하고 사회경제적인 혁신을 이룬 부국강병책을 채택한다. 이를 숙종의 신법이라고하는데 같은 시기 송나라의 왕언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세력이 추진한 정책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때 숙종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벌귀족은 소외되는데 숙종은 거란이 쇠퇴하고 국제질서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다 이를 기회로 삼아 고려를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문벌귀족을 견제한것이다. 화폐의 주조와 유통을 통해 국가가 문벌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려 했으며, 수도 천도를 단행해 문벌귀족의 근거지를 와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의도가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벌귀족들은 숙종의 정국방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문벌귀족의 불만이 커져가고 당시 광범위 하게 일어나던 농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결국 고려의 정책은 여진정벌이라는 강경책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여진정벌 추진의 목적
조선의 여진정벌의 목적은 여진인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서 기인한다. 고려말에 철령위 이북지역에서 여진인의 협조로 성장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여진과의 관계는 우호 하였다. 이는 조선이 여진을 조선의 영향력 하에 완전하게 두었다는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명의 영락제가 동북지역에 대한 초유로 말미암아 조선의 영향력은 이 지역에서 상당부분 사라지게 된다. 여진이 명에 입조하면서 부터 여진인들은 조선보다는 명과 우호관계를 성립하게 되고 조선의 일방적인 무역소 폐지로 인해 생존이 위협받게 되자 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명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여진부족에게 조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정벌을 감행하게 된다. 조선 건국 초기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경우 요동정벌을 주창할 만큼 조선은 북쪽지역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는데 여진과의 일로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벌을 단행했다. 고려가 단기적인 정벌군을 편성 했다면 조선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200년간 15번의 정벌군을 파견하였다.
4. 정벌군 비교
병력구성의 비교
고려와 여진이 첫번째로 맞붙었던 정주성 전투이후, 고려군 총사령관 윤관은 고려군의 주력인 보병만으로는 기병이 주력인 여진을 상대하는데 불리하다고 판단한다.
고려정부는 정주성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창설한다. 별무반은 기존에 보병이 주력인 고려군의 병력구성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만큼 신기군이라는 기병과 특수 보병인 신보군, 도끼부대인 도탕군, 궁수부대 경궁군과 정노군, 그리고 승군인 항마군이 있었다. 별무반을 설치한 목적이 여진 기병의 격파에 있었기 때문에 신기군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러나 신기군은 특수군의 지원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여진 기마전에서 기병 외 병종의 역활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별무반으로 군세를 크게 확장한 고려군은 여진에 대하여 공격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된다.
고려가 정주성 전투의 패배를 경험으로 삼아 기병을 주력으로 한 별무반을 창설 했다면 조선은 고려의 과거 행동을 학습하여 처음부터 기병을 주축으로 정벌전을 펼쳤다. 조선은 200년간 15차례에 걸쳐 여진을 정벌 했으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태종대의 1차 정벌과 초반의 정벌 일수록 기병을 주축으로 하여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특히 1차 정벌은 보병은 전혀 편제하지 않고 오로지 기병만으로 편제한 정벌군을 편성하는등 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략의 비교
고려와 조선 양국간의 전략을 비교하는 것은 일견 무의미해 보인다. 정벌군의 목적 자체가 여진 소탕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인식 아래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여진정벌은 그 목적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고려의 경우 여진정벌이 목적은 여진지역 점령에 있다. 윤관이 쌓게 되는 9성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명이 있는 상황에서 이 지역에 대해서 성을 쌓는 등의 전면적인 점령작전을 개시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군사 작전으로 여진의 수뇌부를 공격하고 이 일대에 조선의 영향력을 보여주기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양국이 보여주는 군사 전술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를 대조해보고자 한다.
고려는 별무반 창설 이후 2차 여진정벌을 나설때의 전략을 중점적으로 보고자 한다. 당시 고려정부는 여진의 군세가 심상치 않고 종래와 다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출정시켰다. 별무반으로 재편성 된 고려군은 약 17만명 이였으며, 당시 약 3만으로 추정되는 여진군을 숫자로 압박하는 대군 압박전략을 펼쳤다. 정주성 근처의 소규모 여진부락을 정리한 고려군은 여진군의 5배에 달하는 병력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특히 기병을 크게 증강한 이후부터는 1차 정벌때와 달리 신기군을 이용한 평탄지형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전술을 세웠다. 고려의 전에 없던 공격적인 전술에 여진은 평탄지대를 버리고 수성을 택하였다.
윤관이 대내파지촌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니, 여진이 우리 군사의 기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모두 도망하여 달아나고 오직 축산만 들에 깔려있었다. 문내니촌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에 들어가 방비하였다.
기사에서 나타나듯 여진의 기병은 압도적인 수의 고려군에게 밀려 수성을 택하게 된다. 고려의 신기군은 수성전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데 여진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일시에 기병을 출격시키는 전법으로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기도 하였다.이러한 고려군의 기병을 주축으로 한 전략은 윤관의 명령으로 9성을 축조하면서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 정벌군은 예종2년(1107) 2월에 영주성, 웅주성, 복주성, 길주성을 쌓았다. 그리고 1년 뒤에는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그 다음달에 의주, 통태진, 평융진에 3개 성을 쌓아서 동북 9성을 완성하고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완벽하게 점령후 영토화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이에 윤관은 이 9성을 지키기 위해 17만의 병력을 대부분 9성에 남겨 방어 하였다. 9성 축조 이후 고려군의 전술이 공세에서 수성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고려군이 함주~공험진에 이르는 여진의 곡창지대에 9성을 축조하자 생존에 위협을 받은 여진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고려의 수성전략은 기병을 완전히 사용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2차 여진정벌 개전 초기의 기병 활용도에 비하면 현저하게 기병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수성전 도중 문을 열고 기병을 출격시켜 적에게 타격을 줄 수는 이었으나 성 밖에 매복된 아군이 없어 여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도 못하였다. 이에 여진은 포위한 성의 10리 밖에 목책을 치고 진지를 구축하여 고려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비하여 고려군의 기병 활용도는 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고려의 여진정벌을 학습하여 정벌군에 기병을 필수적으로 편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태종대에 있었던 1차 여진정벌에서는 보병을 완전히 제외하고 기병만으로만 편제된 정벌군을 구성한다. 이들은 모두 북청 이북지방의 기병이었는데 모두 1,150명으로만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정예병으로 단시간의 기습작전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동력을 살린 기습작전을 통해 작전기간은 단1일에 한정되었으나 여진인 160명을 살해하고 2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세종대에 있었던 2차 정벌전에서는 총 15,000명의 전력이 동원되었는데 그중 1만명이 기병이였다. 당시 최초 계획은 보병 중심이었으나 기습작전을 위하여 기병 중심으로 편제 되었다.
조선은 여진정벌을 위해 기병중심으로 편제하여 기동력을 살린 포위공격과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을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은 대군을 동원해 상대를 압도하기 보다는 소수의 정예병력을 이용하여 적을 기습했다. 이 기습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전략의 승계
고려의 여진정벌과 조선의 여진정벌에는 약 300년의 시간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의 여진정벌에서 전략상의 경험을 토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산지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넓은 평야지대에서의 전투가 적었던 고려는 보병이 주력일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보병으로 넓은 평야지대의 여진기병을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의 보병은 거마창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고려의 규례를 모방하여 방패군을 설치 하였다. 방패군은 돌격부대의 일종으로 적의 선봉을 꺽고 적을 격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조선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기병이 주력으로 사용될 수 없는 구조에도 불구하고 여진정벌을 할때 있어서 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하여 기습작전과 교란등에 사용하였다. 고려가 정주성 전투에서 패배를 통해 배운 경험을 조선은 학습하여 커다란 희생 없이 기병을 준비하여 활용하였다.
5. 여진정벌의 결과와 영향
고려가 9성을 축조하고 그곳으로 주민을 이주시켜 영토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여진의 반격은 계속하서 진행되었다.1107년 윤관의 군사작전이 성공한 이유는 대군의 기습작전에 의해서 였지만 확보한 영토를 유지하고 영토화 하는 과정에는 새로운 차원의 전략이 필요했다. 당시 여진족의 실력자 아골타는 ‘9성이 축조되는 지역을 되찾지 못하면 다른 여러 부족 도 잃게 될 위험이 있다’라는 명분으로 여진족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왔다.
계속되는 여진의 공격에 고려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전과없이 후퇴하자 고려조정에서는 윤관과 오연총, 임언 에게 패전책임을 물어야한다는 의견이 떠올랐다.
완완부 여진 역시도 세력 규합이 필요할때에 고려와의 계속적인 전투는 부족의 기반이 약화될수 있음을 알고 또한 거란세력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와 일시적인 화해가 필요했다.
윤관의 주선으로 1109년 6월 여진의 사자 요불이 개경으로 들어와 강화와 함께 동북9성의 반환을 요청하였다.
“우리들은 고려조정의 수호 윤허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고 계속해 왔는데, 작년에 뜻밖에 고려의 대군이 들어와우리 늙은이와 어린이를 죽이고 9성을 쌓는 바람에 그곳에 남은 우리 백성들이 돌아가 살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태사 영가 께서 저를 보내 고려조정에 우리 옛 영토를 돌려줄 것을 청하도록 했습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겨 9성을 돌려주도록 윤허하여 우리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은 세세손손이 정성껏 조공을 고려에 바칠 것을 하늘에 맹세합니다.”
이에 예종은 신료들과의 논의를 통해서 여진과 강화를 맺고 동북9성을 반환할것을 결정하였다. 1109년 7월 3일 예종은 여진의 사자를 불러 9성의 반환을 통보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이렇게 쉽게 동북9성을 내주었을까. 여기에는 여진에게는 외교전략상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숨어있다. 당시 고려 조정은 고려가 확보한 9성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기 어렵다는 전략상의 난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첫째.신흥 완완부의 군사력이 미약하다고 판단했으나 9성을 축성한 이후 여진족의 반격이 날로 강화되고 있다.
둘째. 장기 소모전을 계속할 경우 고려의 피해는 더욱 가중될 것이다.
셋째. 주요 도로의 장악만으로 동북9성지역의 군사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넷째. 9성의 확보 유지를 위해 산골 험준한 지역까지의 병참선이확보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측의 물적 인적 손실이 엄청날것이다.
다섯쨰. 산악지역에서 매복 기습전을 계속하는 여진족을 소탕하기는 어렵다.
이런 고심 속에서 고려 조정은 9성을 환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관리하기 힘든 영토라고해도 군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영토를 고려정부가 그냥 내줄리 만무하다. 그 뒤에는 외교전략을 위한 노림수가 숨어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거란이라는 세력이 있다는것을 먼저 알아야한다. 당시 거란은 송과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력이 쇠하여 지고 있었는데, 후방에서 여진세력이 일어나자 다급해진 거란은 고려에 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을 무시한 채 고려는 동북9성을 반환하므로써 관계를 개선한 금나라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금나라가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이 점유하고 있었던 보주지역에 군사적 공백이 생겼고 이를 고려는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금나라의 암묵적 이해관계속에서 진행된 연합작전이였다. 여기서 ‘보주(保州)’가 등장한다. 보주는 압록강 유역에 있으며 지금의 의주에 해당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중요 지역이고 강동6주를 호시탐탐 넘보는 거란의 거점지역이다. 이곳은 여진, 즉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고려와 거란이 자주 충돌하는 국경지역이였고 이후에 거란이 군사적으로 점유한 점령지였는데 고려는 이곳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금이라는 세력을 이용하여 결국에는 얻어낸 것이다. 동북9성을 반환하기는 했지만 동북9성을 준만큼의 보상으로 보주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얻어낸 외교상의 쾌거라고 할 만하다. 보주는 압록강 유역에 있으며 지금의 의주에 해당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중요 지역이고 강동6주를 호시탐탐 넘보는 거란의 거점지역이다. 이곳은 여진, 즉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고려와 거란이 자주 충돌하는 국경지역이였고 이후에 거란이 군사적으로 점유한 점령지였는데 고려는 이곳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했다. 고려가 이곳을 거란으로부터 되찾기 위해서는 금나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1117년에 금나라가 거란을 공격하자 고려는 거란의 보주를 즉시 공격하여 점령해버린다. 고려와 금의 연합작전이라고 할 만한 이 사건은 고려와 금 모두 실리 외교적인 성격을 띄었기에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리 외교가 성립되기 위한 주춧돌로써 동북9성 반환이 있었다. 고려 정부는 유지하기 버거웠던 동북9성을 내어주고 금나라와의 외교 관계 개선을 하고, 금과 연합작전을 통해 보주를 취했다.
조선의 경우 여진정벌은 조선의 북동쪽에 통합된 유목세력이 출현하지 못하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또한 그들을 회유하여 조선으로 끌어들이고자 했고 다른 한편으로 정벌전을 수행하여서 통합세력 출현을 저지 하였다.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여진세력들은 당대에 강한 여진 족속들이었다. 이들의 부족적 통합을 막는데에 조선의 정벌전이 한 몫하였다. 또한 이러한 정벌전은 조선의 화약무기에 개량에 크게 기여하였다. 화포는 성벽 위에 설치하는 방어용 무기로만 사용되었지만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화포가 소형화 되었고 이는 곧 공격용 무기로 활용되었다. 화포의 경량화는 여진의 거주지 및 매복지역인 초목지대에 화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조선군의 화력을 증대시켰다. 이는 조선군 전술에 대대적인 발전을 가져 왔는데 화포를 사용한 공격 전술이 개발되고 이를 여진정벌에 사용하였다.
반면에 조선의 여진정벌은 조선의 군사적 취약점을 노출시켰는데 조선의 전략이 단기 기습전략에만 국한 되어 장기전쟁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장기적으로 여진 거주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자 여진은 통합운동을 서두를 수 있었고 곧 후금이 건국되어 조선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6. 결론
고려의 여진정벌은 비록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게 되지만 그로 인해 쌓은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거란에게 빼앗겼던 보주를 되찾는다. 보주는 현재의 의주로써 보주를 확보하므로써 현재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확보하게 된다. 조선의 태종대 여진정벌은 여진이 자국에 속해 있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였기에 이 의식이 더욱 확대되어 여진지역을 정벌 하였으며 후에 세종대에 4군 6진 개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두 여진 정벌 모두 현재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압록강~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짓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오늘날 중국과의 국경선에는 두 번의 여진정벌이 그 배후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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