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된 한량
목차 1.머릿말 - 왜 원세개인가 2.심복의 길 출세의 발판, 이홍장. 영록의 눈에 들다 서태후의 심복이 되다. 칩거 그리고 재등장. 3.황제의 길 잠시 미룬 꿈. 총통에 이르다. 4. 황제, 그리고 그 이후 5.결론 |
1.머릿말 - 왜 원세개인가
원세개. 위안 스카이. 개항기 조선에 대해 배우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이름이다. 청나라의 관리로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던 인물로 내게는 기억 되고 있다. 그러나 원세개는 내가 알지 못했을뿐 당시 조선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다.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에서부터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서의 굵직한 사건들에 모두 연관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에서 청국 황제를 대신하여 이리저리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지만 그는 청국에서 과거를 통해서 관리가 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이번 보고서를 위하여 조사를 하면서 원세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다.
처음 어떠한 인물을 고를지에 대해서 고민을 할 적에 그래도 조선과 조금이나마 연관이 있고 들어본 적이 있는 인물을 선정하고자 하였기에 원세개를 선택하였는데 알아볼수록 이 사람은 굉장히 흥미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출세길인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한량으로 지내다가 기회를 잡고 무인으로써의 길을 가고자 하였고 그 와중에 뇌물과 청탁, 그리고 살인등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인간상이 원세게 한명에게 녹아들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한편으로는 현재의 중국이 이홍장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 성장으로 미국을 위협하며 도시들은 밤마다 화려한 불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양극화 문제와 인구문제, 1당체제에서 불거지는 필연적인 정치적 갈등등의 모습이 다면적 모습을 지녔던 원세개와 닮았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당대의 중국과 원세개가 품었던 야심, 그리고 그걸 실현해 나가려던 결단력 하나 까지도 원세개를 원세개로 만들어주는 매력임에는 틀림없다.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우는 이 남자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던 한량에서 황제까지의 길을 걸어온 매력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가 왜 간웅으로 불리우는지, 어떻게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첫장은 원세개가 어떤 사람 밑에서 권력을 키웠는지, 누구의 심복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심복의 길로 구성하였고 두번째장은 원세개가 꿈꾸었던 권력의 끝, 황제가 되고자 했던 권력가 원세계의 모습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그토록 원하던 황제가 되었지만 곧 물러나야만 했던, 그리고 곧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원세개의 모습으로 구성하였다.
2.심복의 길
출세의 발판, 이홍장.
20세기 초 중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중화제국의 초대황제인 원세개의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나는 사람은 이홍장, 장소는 조선이라고 본다.
이홍장을 만나기 전의 원세개은 오장경이라는 사람의 아래에서 지내면서 군 실무를 익히기 시작하였다.오장경의 신임을 얻은 원세개에게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으로의 파견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이 일어나 정세가 혼란해진 시기였다. 이에 천진에 머무르고있던 조선의 대신 김윤식은 청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부모의 상을 입어 대리인 장수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그가 이를 즉시 받아들여 조정에 상소하여 원세개의 상관인 오장경 또한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 영무처에서 일을 하던 원세개에게 군수품 공급을 책임지게 하고 행군 노선을 탐사하게 하였다. 이 일을 맡은 원세개는 공을 세울 욕심에 흥분하여 조선 해역에 닿자 물불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 하였다. 청의 군대가 조선 영토에 상륙하면서 일부 군사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원세개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밤낮으로 순시하고 조사하여 규율을 위반한 병사들을 과감하게 처단함으로써 군기를 세웠다.
이후 오장경의 부대는 한성에 도착하여 임오군란을 평정하고나서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계속 한성에 주둔하였다. 원세개 역시 같이 남아 있었는데 이때에 고종이 청 군대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열었던 연회에 자주 참가하면서 고종과 단독으로 접견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인들과 청국인들의 개입으로 인해 굉장히 어수선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개화파들은 일본 공사와 일본군의 지지를 등에 업고 우정국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고종을 납치했다. 그리고 고종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울 작정이었는데 이를 갑신정변이라고 한다. 이때 원세개는 정변의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인솔하여 조선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고종을 구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일본군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치뤘는데 이를 보고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개화파를 포기하고 일본군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후 청군이 납치당한 고종을 구출하고 조선의 조정을 회복하였다. 일본 공사 다키조에는 인천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피신하고 김옥균 등도 따라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렇게 3일천하는 끝을 맺었다. 청국의 입장에서 볼떄 갑신정변의 전격적인 진압은 전적으로 원세개의 공이였다. 원세개가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날때까지 조선에서 10년간 위세를 떨칠 수 있게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영록의 눈에 들다
청국 조야가 이홍장을 격렬히 비난하는 상황에서 원세개 또한 전쟁 유발자로 낙인 찍혀서 운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칩거중인 이홍장에게 찾아가 휴가를 받아서 낙향한다.
고향에서 낙담하여 소일하고 있을 때 문득 조정으로부터 광서제 알현차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가 왔다.
이유는 청일전쟁 참패를 계기로 군제를 서양식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그의 제안이 높이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광서제는 원세개의 의견을 맞다고 생각하여 원세개를 군무처로 보냈다.
원세개는 도독 군무처의 장경으로 임명되었는데 일이 많지 않은 직책이었다. 권력의 욕망이 무척 컸던 원세개는 이런 조용한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지들을 찾아가서 갖가지 수단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꾀하면서 출세의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군무처의 대신들에게 아부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부 상서 이홍조는 원세개의 당숙 원보령의 스승이었는데 원세개의 성실한 자세에 감복하여 이같이 천거하였다.
그러나 군비를 횡령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서태후의 심복인 영록이 조사차 그의 군대를 오게되었다. 원세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와 함께 신건육군의 절도 있는 훈련을 열병한 영록은 그를 칭찬한 뒤 그를 책임감 강한 장군으로 추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원세개는 영록의 충실한 심복이 되었다. 그는 고아서 23년 7월 군사훈련을 훌륭히 해낸 공을 인정받아서 직례성의 안찰사에 제수 되기도 했으며 영록을 따라 서태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사건이다.
서태후의 심복이 되다.
광서 24년 무술년에 들어와 변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는 청일 전쟁 이후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 시대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조정에 변법의 필요성을 호소한 데에 따른것이다.
이때 광서제는 명정국시를 발표하며 변법을 선포하였다. 변법을 두고 유신파와 수구파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강유위의 추천으로 원세개는 광서제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광서제는 군대의 통솔을 맡기면 충성할 수 있겠느냐 고 원세개에 묻자 원세개는 충성을 다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 이후 광서제는 원세개를 즉시 승진시켰다. 이렇게 광서제의 총애를 받던 원세개는 돌연 황제를 배신한다. 서태후를 중심으로하는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강유위등 유신파들은 쿠데타를 계획하였는데 원세개가 그 적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광서제 앞에서 충성을 다짐했던 원새개는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쿠데타 계획을 영록에게 밀고하였다.
그렇게 무술정변이 일어나 강유위와 양계초 모두 일본으로 망명하고 세간에는 원세개의 배신 행위를 비난하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무술정변을 계기로 서태후는 원세개에게 직례총독을 대리케하였다. 이때 부터 원세개는 북경을 부단히 방문하면서 정치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서태후의 심복인 환관 이연영과 깊이 교유하며 서양에서 구입한 마차와 아편등을 뇌물로 바쳤다. 서태후에게 계속 뇌물을 바친 덕분에 곧 공부우시랑으로 승진하여 군대의 훈련도 계속 맡았다.
서태후의 심복이 된 원세개는 승승장구하여 산동순무 서리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의화단을 혹세무민이라 하여 이들의 활동을 엄금 하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하여서 열강을 중국 내에서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태후의 지원에 힘임은 의화단이 북경으로 몰려들자 열강 8개국이 연합을 하여 2000여명이 북경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전쟁을 선포하고 각 성의 독무들에게 의화단을 모아서 열강에 대항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홍장, 장지동, 유곤일 등과 합세하여 이를 거절하고 성내에 있는 의화단을 섬멸하였다. 자신의 주인마저도 배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면이다. 이에 열강은 원세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서태후가 황제와 황태자를 데리고 서안으로 몽진하자 자신의 책임 추궁을 두려워해 영록에게 해명을 하고 서태후에게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낸다. 이로써 열강에게도 호감을 사고 서태후를 배신한 죄도 묻지 않게 되어서 이 일을 계기로 원세개는 이홍장과 어깨를 견주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얼마 뒤 이홍장이 병사하자 서태후는 곧바로 그에게 북양대신겸 직례총독을 맡게하였다. 산동순무가 된지 2년만에 최고의 독무 자리에 오르게 된것은 열강의 비호와 영록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칩거 그리고 재등장.
승승장구하던 원세개 역시 서태후가 죽게 되면서 부터 청 황족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하였다.광서제와 서태후가 몇일 차이로 죽고나서 광서제의 동생인 재풍의 아들 부의가 황제로 즉위한다. 부의는 3세인 어린아이였기에 아버지인 순친왕 재풍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재풍은 황족들이 원세개의 군사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원세개가 자신의 자금줄인 개평탄광국까지 손을 뻗자 분개 했다. 그는 원세개를 파면하고 법부에 넘겨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장지동과 혁광이 말리고 들었다. 그래서 순친왕은 자객을 동원해 원세개를 제거 하고자 했으나 원세개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에 다리를 핑계로 등청하지 않자 순친왕은 이를 이유로 이듬해에 모든 직무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회적 처분을 내렸다. 이에 그는 곧 기차를 타고 북경을 떠나게 된다.
역에 나와 배웅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은거를 각오하고 있던 원세개는 자신의 부하들이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있는것에 큰 기대를 걸었다. 서세창과 단기서, 당서의 등 원세개의 영향력은 산동, 하남, 강소를 넘어 멀리 만주지역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원세개는 순순히 칩거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원세개는 고향에 은둔하고 재기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사돈인 하영병이 창덕 북문 밖 원상촌의 고택을 팔려하자 이를 구입했다. 이곳은 하남성과 하북성이 만나는 곳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 북경과 가까웠다. 이곳에서 옛 부하 및 친구들과 어울려 달빛 아래 시를 읖고 술이나 마시면서 여유를 즐겼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벼슬자리를 청탁하면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힘이 없다고 잡아 떼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성심껏 도와주었다.
그가 이러한 여유를 보일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수하들이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년간의 칩거생활을 하던 원세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사이 장강 남북의 각 성에서 농민들이 곡물세 거부와 미곡 투쟁을 일으켰고 일본이 만주침탈을 본격화 하면서 혁광등의 관원이 원세개를 동북3성의 총독으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열강들도 그의 등용을 지지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자신의 행적을 숨기며 병에 걸린것 처럼 연기했다. 그러다 마침내 장건이 그에게 찾아왔을때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 하며 재 등용 되기를 바랐다.
3개월뒤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순친왕은 혁광에게 원세개로부터 황권을 보장한다는 서약을 받아내고 나서야 마지못해 그를 복권시킨다.
3.황제의 길
잠시 미룬 꿈.
당시 청조는 각지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봉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은 태평천국때보다 더욱 심각했다. 혁명군은 무창을 시작으로 한양, 한구, 경산, 천문, 황주 등을 점령하는등 각 성들의 독립이 점점 심해지면서 순친왕은 그간 미뤄오던 헌정 실시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사면하는등의 성지를 내렸다. 그러나 각지의 봉기로 청의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자 원세개와 그의 측근들은 행동을 서둘렀다. 원세개가 혁명군으로 부터 한구를 탈환하자 조정에서는 내각을 원세개가 다시 새롭게 조직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원세개의 의도대로 모든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원세개의 측근 장일린은 전보로 원세개에게 직접 황제에 오를 것을 권고했다. 또 다른 측근 예사충 또한 이러한 권고를 한 적이 있었다. 원세개는 마음이 끌렸지만 한번 더 참았다.
원세개가 다시 세상아 나온것은 황제의 황은을 입은것이었다. 그런데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 두 모자의 수중에서 천하를 빼앗는다면 욕을 먹을 것이 뻔했다. 조정에는 아직 오랜 신하들이 많고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북양군의 장성들 또한 꼭 자신을 지지 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고 민심 또한 배반하는 것이었기에 탐탁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주의 깃발을 내거는 것은 분명 혁명군과 조정 양쪽의 강렬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고 지계 부대중 황실에 충성하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황제의 꿈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리고 원세개는 청의 편에서 형명당의 민국군과 싸우기로 마음을 굳혔다.
총통에 이르다.
11월 9일 혁명당 내에서 손문 다음가는 인물인 악군의 총사령 황흥이 원세개에게 만주족의 청조를 뒤엎고 한족의 정권을 세우자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원세개에게 새로 성립될 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밀어줄 것을 약속했다. 원세개는 이에 고무하여 협상을 제의 했으나 혁명당은 공화정을 내세우며 입헌군주제를 거부하였다. 한양에서는 관군과 혁명군의 대치가 지속되는 와중에 손문이 남경에서 임시총통에 취임해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청조타도를 전제조건으로 원세개를 초대 총통에 추대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원세개는 변발을 자르고 크게 웃으며 국무대신들과 상소문을 올려 선통제의 퇴위를 압박하고 나섰다. 결국 융유태후가 선통제 퇴위조서를 선포함으로써 청조를 종식 시켰다. 그렇게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임시총통에 취임하고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반년 뒤 10월 정식으로 초대 총통에 취임한다.
4. 황제, 그리고 그 이후
1915년 원세개는 일본측이 제시한 21개조를 받아들여 격한 비난을 자초했다. 이듬해 그는 중화제국의 황제를 칭하는 무리수를 두었다가 안팎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바로 취소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원세개의 측근이던 단기서와 풍국장들은 반갑게 보지 않았다. 이들은 내심 원세개의 뒤를 이어서 총통이 될 생각이었는데 그렇기에 군주제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원세개의 아들 원극정은 군주제를 추진해 아버지를 황제로 만들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조상 묘지의 묘지기를 사주하여 낡은돌을 날조하거나 <순천시보>를 위조하여 원세개에게 보여주었다. 원세개는 자신의 아들 원극정에 의해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것이다. 원극정의 측근들은 전국 청원연합회를 결성해 원세개에게 많은이들이 즉위를 바라고 있는것처럼 보이게 하였고 참정원에서 즉위 추대를 하게 하여 원세개를 황제에 올렸다.
이에 손문은 국민당을 중화혁명당으로 개편한 뒤 중화혁명군을 조직해 정면대결을 불사했다. 원극정은 상황이 급박하다는걸 깨닫고 원세개를 서둘러 황제에 올린다.
황제가 된 원세개는 민심을 잡고자 고심하였다. 그러나 안팎에서 그의 제위를 반대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신문에 자신들은 원세개와 의를 끊을것을 광고하는가 하면 의형제를 맺었던 서세창은 낙향하기까지도 했다. 운남에서는 독립을 선언하고 반원군을 조직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으며 태자 문제 또한 그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그러던중 원세개가 퇴위를 결심하게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 났는데 시녀가 사온 잠두콩 봉투를 보고 원세개가 화가 난것이다. 그 봉투는 <순천시보>로 만들어진것인데 진짜 순천시보의 기사를 보게된 원세개는 이를 위조한 장남을 화를내고 퇴의를 결심한다. 자신의 북양군 또한 호국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심복 당천희의 배신에 병을 얻고 그 병때문에 곧 죽게된다.
당대의 권력자 원세개가 죽게되면서 그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쟁탈하기위해 군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5.결론
원세개가 황제가 되지 않고 계속 총통직을 유지했다면 어떠했을까. 역사의 평가는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지난세기 그에대한 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간교한 처세술로 변법을 무산시키고 서태후를 배신하는등의 행태와 시대 착오적인 군주제 주장등이 그 골자이다. 실제로 국적이 중국인 지인은 원세개를 한마디로 평가해달라는 말에 믿을 수 없는 나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는 긍정적인 면들도 보기 시작했다. 낡은 전통을 혁파하고 교육제도를 개혁하고 청조의 붕괴이후 지방세력을 진압해 통일을 이루기도 했던 점들이다. 이러한 점들에 일견 동의를 보내며
원세개의 일대기를 공부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원세개의 교육제도 개혁을 좋게평가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과거제를 폐지한 것이 일생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식 학교교육이 중국에 뿌리내리는데에 결정적인 장애물을 제거한 셈이다. 신식 학교에 교원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세개는 서양학을 공부한 교원들을 물색하고 사범학교를 세웠으며 일본의 사범학원에도 학생들을 파견하였다. 이런 원세개의 적극적인 지원덕에 신식 교육은 급격히 발전하였다.
두번째로 그는 자신의 측근을 만드는데에 재능을 보인다. 원세개가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을때 이 변란으로 상해를 입은 조선의 대신들 가족에게 위로금을 주곤 했는데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않는 원세개의 모습이 보여진다. 이러한 행보는 신건육군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과성에서도 보여지는데 당시 그의 부하 완충추가 기생을 첩으로 맞으려 하자 이를 불명예스럽다며 허락하지 않았다가 은밀히 거금을 들여 기생을 빼내 완충추와 결혼시켰다. 이 일로 그는 원세개에게 죽을 때 까지 충성 하였다. 심지어 칩거 기간에도 그에게 벼슬자릴 청탁하는 사람들중 가까운 사람인 자는 끝까지 신경을 써줄 정도로 심복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와 같은 원세개의 심복 만들기는 그가 황제의 길까지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권력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출세를 하기위해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무력, 즉 군대이다. 이홍장이 병사 했을 당시 서태후는 원세개에게 바로 후임을 맡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영록의 추천이나 열강의 비호도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세개의 군대만이 청 황실을 보좌할만한 무력을 가졌다는게 크게 작용했다. 군대가 자신의 권력기반임을 정확하게 인지했던 원세개는 러일 전쟁때 서태후를 설득해 휘하 북양군을 더욱 크게 만들었으며 장성들은 모두 그의 심복이었다. 이들을 믿고 있었기에 칩거 당시에도 여유를 부리면서 정자에서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공부에서 도망친 이른바 실패자이다. 그러나 난세의 혼란기를 기회로 보잘 것 없는 한량에서 짧지만 중화제국의 황제까지도 역임하게 된다. 마치 드라마와 같은 삶이다. 그 방법이 비록 배신과 회유,암살하고 뇌물을 바치는등 그 방법이 정당하지는 못했으나 그 당시의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원세개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는 과정이 반갑게 느껴진다. 과소 평가 되었던 긍정적인 면들이 좀 더 부각되어 객관적으로 원세개가 평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허우이제 씀 장지용 역, <원세개>,지호, 2003
이영자, <조선에서의 원세개>,신지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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