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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령시기 러시아 경제, 사회,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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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4. 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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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령시기 러시아 경제, 사회, 제도




  1. 분령시기 러시아의 경제


분령시기 러시아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쇠퇴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은 상당부분의 옥토를 상실했고 산림지역과 가혹한 기후속에서  농업을 발전시켜야했다.

몽골과 더불어 러시아인들을 괴롭힌것이 페스트 이다.
페스트는 14세기 중반에 북동부 러시아에 퍼졌고 100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로인한 사망자수는 전체인구의 25센트에 달했다.
몽골과 흑사병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북동부지역은 몽골의 지배로부터 도망친 이주민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이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된 북동부는 상업을 통해 서서히 경제가 발전했다. 14세기 무렵 북동부지역은 몽골제국이 편성한 중국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교역망에 참가했다. 러시아인들은 모피와 밀랍등을 수출했고 다양한 사치품등을 수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익은 압도적 다수의 농민들에게서 나오는 농업이익에 기인하고있다.  


  1. 분령시기 러시아의 사회와 봉건제 문제


전문가들은 12세기 초반까지는 러시아에 봉건제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른 유럽국가들과 다른점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파블로프 실반스키는 세세한 연구를 통해 러시아도 봉건적 단계를 경험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봉건제의 중요 특질은 세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세가지 모두 러시아에 부합된다고 보았다.  

1).국가가 독립적, 반독립적 토지로 분화되는것.

2).이 토지가 봉신관계의 서열에 따른 단일 체계에 포함되는것.
3). 봉지를 조건부적으로 보유하게 되는 것.  
파블로프의 반대자들은 러시아 지주들이 분령시기에 토지를 유산으로 획득했다는점을 들어 러시아의 봉건제가 초보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봉건제의 법적특징을 근거한다면 정확한 의미의 봉건제는 아니지만 유사점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방향은 봉건적이라는 말보다 중세적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며 러시아가 봉건적이었냐를 탐구하기보다는 언제가 중세를 벗어난 근대 초가 되었는지에 대해 더 몰두하고 있다.


  1. 분령시기 사회와 제도들


분령 시기 러시아의 사회구조는 키예프  연속된 사회였기에 명확한 단절은 없었다. 공들은 계속해서 특권계급을 차지했으며 가문은 계속해서 분화하였고 수적으로 증대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공들의 수는 모스크바가 확대되면서 감소되었다. 보야르들은 자신에게 속한 가신을 뒀는데 때때로 천명 이상의 가신을 둔 보야르들도 있었다.

분령지 러시아의 상층구조에는 지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영지의 실질적 지배자이며 세금을 거두고 재판권을 행사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성장하면서 이들의 불수불입권은 중범죄의 사법권에 까지 미치지 못했다.


모스크바국의 대두에 따른 토지소유권의 변화는 영지의 형태가 보트치나에서 포메스티예로 바뀐것이다.

보트치나는 세습영지였는데 이것은 매입,매매가 가능한 사유지였다. 이것을 모스크바 대공이 모두 압수하여 조건부 토지보유형태인 포메스키예로 일반화시켰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 봉직을 맡은대가로 공의 재량하 부여된 토지였다.


상인과 수공업자들, 중간계급은 전체적으로 감소되었고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농민들은 인구의 상당부분을 구성했으나 지위는 키예프 몰락이후 계속해서 악화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지주에게 예속당했다. 농민들이 부담했던 두가지 의무는 바르시키나, 즉 노동력이었으며 오브로크로서 생산물이나 화폐를 지주에게 지불해야했다. 국가는 영주를 위해  농민들이 지력이 떨어지면 이주를 하는것을 제약하기위해 다양한 법률로 이를 제약했고 농민들은 사유지에서 농노로 결박되었다. 하지만 북부의 농민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키예프가 몰락했음에도 러시아의 교회는 계속 발전했고  분할시기에도 최상의 조직으로서 이익을 얻었다. 교회의 재산 역시 지속적인 기부를 통해 증대되있다. 분령시기 말에 러시아 교회는 모든 경작지의 25센트를 소유하였다.


러시아가 모스크바 아래서 통일된것은 북동부 정치체지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 체제의 특징은 공이 지배적 권위를 가졌단 것인데, 최근의 연구에서 학자들은 모스크바에서도 공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모스크바의 차르들은 상당한 위엄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가 소공국일때의 과거 모습을 간직했다. 많은 학자들은 표면적으로 전제정치가 강화 되었다 하더라도 , 자문과 합의를 통해서 대공과 보야르로 구성된 통치계급이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는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조약, 협정, 군사행동, 법전이 체결되거나 제정될 때에는 지도적 보야르가 입회해야 했으며 유력인물들이 동의해야했다.

1497년 수데브닉의 앞 구절에서 “대공이 보야르들과 결정했다…” 라는 문구는 단지 형식적 표현이 아니라 , 합의된 권력관계의 복잡한 구조를 반영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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