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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예카테리나 2세의 후계자, 파벨의 통치 (1796-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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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7. 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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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예카테리나 2세의 후계자, 파벨의 통치 (1796-1801)

러시아제국의 9대 황제 파벨 1세

예카테리나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파벨이 제위에 올랐다. 파벨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 의해 폐위되었던 것을 보고 자랐기에 어머니와 그의 측근들으 증오하고 적대시 했다. 그래서 그는 즉위하면서 바로 어머니 통치기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원상복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측근들을 감옥에 집어넣었으며, 폴란드의 독립영웅 코시치우슈코 같은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였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정책에서 귀족들의 활동을 의심했으며 이들의 귀족헌장과 도시헌장을 취소해버리고 국가와 사회에서 모두 군사적 모델을 적용시켰다. 동시에 외국패션과 외국 서적, 여행들을 금지시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군사적인 것에 집착했으며 성격마저도 괴랄했다. 조증, 사이코패쓰 등의 묘사가 남아있으며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왕이었다. 그리고 파벨은 러시아 제위 계승법을 변경하여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했던 표트르 대제의 규정에서, 남성 혈통의 장자 상속제로 대체하였다. 이로써 결국 러시아는 엄격히 정해진 안정적 제위 계승 원칙을 갖추게 되었다. 

13세기의 몰타 기사단

파벨의 통치대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외정책과 전쟁이었다. 파벨은 프랑스 혁명정부의 적으로 돌아섰는데, 2차 대프랑스 동맹에는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나폴리, 포르투갈, 투르크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파벨에 의해 조직되었고, 프랑스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는 동맹의 일원으로 해군을 이용하여 투르크가 지배하던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서 프랑스로부터 이오니아 제도를 탈취했다. 그리고 그곳에 투르크 보호령이자 러시아가 통제하는 공화국을 세웠다. 러시아 황제인 파벨이 공화국 몰타 기사단의 기사단장 역을 수용하면서 공화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므로 러시아는 지중해까지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

러시아의 장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또한 러시아군은 저지대 지방과 스위스에서 동맹군과 합류했으며,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수보로프 장군이 지휘하는 1만 8천명의 러시아 군은 4만 4천의 오스트리아 군과 함께 5개월에 걸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1798-1799) 그러나 다른 전선에서는 동맹군이 패배하며 라인이 무너졌고 러시아군은 알프스 산맥을 거쳐 독일 남부로 후퇴했다. 이 스위스 군사 작전 바로 직후에 러시아의 장군 수보로프는 7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고, 러시아는 가장 유능한 장군을 잃었다. 

혁명전쟁 당시의 프랑스군, 발미 전투

파벨을 네덜란드에서 러시아군을 적절하게 지원해주지 못한 오스트리아와 영국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사실상 동맹을 포기했다. 그는 1800년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프랑스가 혁명이 끝나고 안정되었다고 여겨 동맹을 포기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계가 적립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러시아를 적대했다. 영국이 러시아를 적대하며 몰타를 공격해서 점령하자, 파벨은 돈 카자크들에게 육로로 인도를 공격하라는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리지만, 곧 황제가 피살되며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1세는 이들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파벨의 아들 알렉산드르

파벨은 1801년 3월 러시아 궁정 혁명으로 피살되었다. 그의 난폭함과 무례함,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측근들 조차 황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대만을 편애하는 행동은 근위대의 적대감을 불러왔으며, 영국을 배신하고 프랑스와 연합한 것은 러시아 내부 세력의 불만까지 키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 장관 표트르 팔렌 백작은 이러한 불만의 중심이었고 파벨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대공은 이 음모에 동의했다. 파벨의 죽음이 계획되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파벨의 시대는 저물고 결국 황위는 알렉산드르가 이어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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