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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예카테리나 대제와 푸가초프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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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6. 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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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예카테리나 대제와 푸가초프의 반란

농민반란의 지도자 푸가초프

입법위원회를 통해서 촉발된 러시아 내부의 갈등은 푸가초프의 반란으로 터져나왔다. 입법위원회 활동 당시에 소외되었던 코사크 출신들은 쌓였던 불만을 반란으로 표출하였다. 반란의 수장인 푸가초프는 돈 코사크 출신으로 코사크의 기득권층이 점차 모스크바의 권위를 받아들이는데에 불만을 품었다가, 입법위원회 활동에서 코사크가 차별받는 상황에 결국 반란이라는 결과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장에서의 뼈가 굵었던 인물로, 1772년 11월에 우랄 카자크에 나타나서 농민들에게 자신이 예카테리나 대제의 남편이자 차르였던 표트르 3세라고 말하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많은 농민들은 표트르 3세가 농노를 해방시키려고 하다가 살해당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살아 돌아온 참칭자에 대해서 지지를 보냈고, 우랄강과 볼가 유역에서 커다란 세력이 반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카잔과 같은 주요도시를 포함해서 유럽 러시아의 동부에서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반란군의 수는 1774년 1월 무렵 약 3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푸가초프의 반란에는 당시 러시아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사회적 불만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카자크들을 기반으로 촉발된 반란이지만 여기에 농노와 농민들, 광산과 공장에 소속된 농노들, 도시 빈민들, 구교도들이 참여하면서 세력이 확대되었고, 여기에 바슈키르인과, 타타르인, 칼미크인 등 우랄쪽 세력이 참여하면서 반란은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반란에 참여한 모든 집단은 제정 러시아에 의해 자신들의 전통적 기반과 문화가 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반란군은 연설과 선언문을 통해서 ‘표트르 3세’는 모든 농민은 사적 지주가 아닌 차르의 아래에서 일한다는 형식의 농노제 해방을 이야기 하고, 모든 토지는 대가 없이 이용할 수 있고, 세금과 징병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구교도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선언서에는 종교적 언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로인해 푸가초프는 그리스도의 구원자로 묘사되기도 했다. 

 

푸가초프의 처형

당시 제정러시아는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반란지역에 대한 병력부족에 허덕였기에 이 또한 반란이 커질 수 있는 여건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잘 훈련된 부대가 도착하자 반란군은 곧 패퇴하고 시작했다. 무기의 수준과 훈련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었기에 이들은 우랄지역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결국 1774년 하순에 푸가초프의 부하들은 그를 정부군에 넘겨주었다. 푸가초프는 쇠사슬에 묶인 채 모스크바로 압송되고 사회 반란자들처럼 처형되어 머리는 꼬챙이에 꽂혔고, 신체부위는 여기저기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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