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쿠데타와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 여제와 표트르 3세
1741년 엘리자베타 여제는 근위대를 이끌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안나의 후계자 이반 6세를 폐위시켰다. 엘리자베타는 표트르 대제의 딸로서 안나 여제가 데려온 독일인들의 정치를 종식시킨 토착적인 여제로 평가받았고, 과거의 모욕을 청산하고 황금시대를 이끈 통치자로 칭송 받았다. 그녀의 초상화는 언제나 여성스러움과 온화함이 강조되었고, 그녀의 공식적인 이미지중 하나이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라주몹스키와 사실상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축을 돌보던 평범한 카자크 인이었는데, 가수로서 궁정에 불려왔다. 그러다가 여제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라주몹스키는 여제의 가까운 측근이 되었지만 국사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제의 또 다른 총신이었던 이반 슈발로프는 청렴성과 친절, 러시아의 계몽에서 독보적인 명성을 남겼다. 그가 설립한 모스크바 대학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여제에 의해 백작이 된 그는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국가업무와 재정적, 경제적 문제, 그리고 군대 업무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하지만 부패한 관리였으며 그로 인해 엘리자베타 통치시기의 재정정책이 파국에 치달았다. 또한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치도 국가 재정에 위기를 초래했다. 야사에 따르면 1만 5천벌에 이르는 옷을 구입하면서 재정 위기를 확대시켰고, 프랑스의 모자 제작자는 더이상 러시아 궁정에 외상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1761년 말에서 1762년 초 사망하자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표트르 대제의 외손으로 유아기 때 모친을 잃고 청년기에 부친을 잃었다. 부친이 칼 12세의 누이의 아들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스웨덴의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었으나, 엘리자베타가 후계자로 지명하여 로마노프 가문의 제위를 잇게 되었다. 표트르 3세는 14세 이후로 러시아에서 계속 거주하였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행동이 매우 난폭했고 지적 능력이 낮았던 그는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무서워하고, 경멸했다. 대신 프로이센을 좋아했고 프리드리히 2세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있었다. 이는 대외정책에서도 나타나 7년 전쟁에서 러시아군을 철수 시켜서 프로이센의 패배를 막았다. 러시아 황제는 자신의 이익을 잃으면서 까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몰락을 막고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하였다.
표트르 3세는 이 조치로 국내외에 적을 만들었고, 1762년 자신의 아내 예카테리나가 표트르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킬 빌미를 주고 말았다. 독일에서 시집온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3세와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여제가 되었다. 앞서 나왔던 표트르 대제의 부인이 아닌 이름이 같은 사람으로 그녀는 예카테리나 2세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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