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예카테리나 대제의 등장과 나카즈 (1762-1796)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의 남편이자 러시아의 차르인 표트르 3세를 제치고 스스로 차르가 되었다. 그녀는 러시아인은 아니었다. 독일의 할트-제르프스트 소공국에서 공주로 태어나서 성장했다. 열 다섯살이 되던 해인 1744년에 표트르 3세와 결혼하고 러시아의 황후가 되기 위해 러시아로 왔다.
그러나 황후 시절 예카테리나는 그다지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좋은 황제가 아니었으며 좋은 남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 독일 출신의 황후는 고립되어 있었으며 때때로는 위태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러시아 문학에 대해 공부했으며 어릴 적 배웠던 프랑스어 덕분에 계몽주의적 관점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젊은 황후는 궁정 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결국 1762년 여름에 성공적인 쿠테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폐위시키고 죽음을 맞게 하였으며, 스스로 차르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 여제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집권 초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했다. 여제는 어떠한 명분이나 근거 없이 차르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이 부족했다. 근위대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별다른 지지세력도 없었고, 원로 정치인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새로운 차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정치를 확고히 펼쳐나갔다. 표트르 대제를 벤치마킹하여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고, 인기를 얻어나갔다. 시간은 여제의 편이었고 결국 정통성 문제는 많은이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예카테리나는 계몽주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법전을 새로이 편찬하려 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법은 서구화 이전인 1649년에 편찬되었고, 이를 개선해 러시아인들의 생활을 합리적이고 근대화 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입법위원회를 소집하여 법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의 기본 생각을 담은 나카즈[Nakaz](훈시)를 작성하여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녀는 훈시에서 고문과 사형제도를 비난 했고, 범죄예방을 외쳤다. 농노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없애자고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전체적으로 나카즈는 매우 진보적인 문서였기에 프랑스에서는 금지되기도 했다.
1767년에 심의를 시작한 입법위원회는 지명인 28명과 선출인 536명을 포함해 모두 56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원로원 처럼 국가기관을 대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농노가 배제되어있었고 성직자도 배제되어있었다. 이들은 1년 반 동안 203번의 회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위원들이 계급별 노선에 따라 분열하고 서로의 계급적 이익만을 주장하다보니 회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1768년에 투르크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입법위원회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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