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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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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4. 1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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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 이기붕 일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우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단독후보로 결과는 정해졌고, 세간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패한적 있는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거를 조작하려 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나이가 많아 갑작스럽게 서거한다면 이를 이어 국가를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부통령 자리는 결국에는 대통령 자리를 받을 수 도 있는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통령후보 이승만과 조병옥

자유당 정권은 야당이 선거유세를 펼칠때마다 공권력을 동원한 조직적인 방해를 시행했다.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요일에 등교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투표 당일에는 3인조 공개투표, 9인조 공개투표, 자유당 완장을 찬 인원의 투표자 위협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어 투표에 영향력을 미쳤다. 

부정선거

그러나 이러한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투표일 이전에도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이를 진압하면서 발포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당시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한달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혁명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위 당시 경찰은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체를 바다에 몰래 버렸던 것이다.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은 거리로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정부는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시위는 오히려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공격당하면서 부상자가 생겼다. 다음날인 4월 19일에는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일반시민까지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물론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대를 동원하고 시위대에게 발포하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시위대는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국민의 분노는 더 커질 뿐이었다. 시민을 향해 발포하던 계엄군조차 시위대에 동조하고, 심지어 서울 시내의 대학교수단도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김주열 열사

이러한 시위의 열기가 반미 분위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미국은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렸고, 이승만은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민주당은 선거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국무총리에는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4월 혁명의 이념을 모두 소화해내기에 역부족이었고, 5.16군사 쿠테타가 발생하면서 4월 혁명이념의 실천은 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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