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단독정부 수립과 이행 남북 분단의 고착
일본이 항복하면서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는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실질적인 한반도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북한의 소련은 간접지배로, 남한의 미군정은 직접지배를 통해 통치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소련 3국 외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향후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6년간의 일제 통치에서 겨우 벗어난 한국인들에게 신탁통치는 또다른 제국주의 지배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과를 놓고 국내에서는 격렬한 논의가 일어났다. 우익은 이를 두고 새로운 제국주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대하였다. 이들은 반탁운동을 전개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좌익의 경우 임시정부 수립에 주목하여 회의 결과를 전체적으로 지지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나누어 대립하게 되었다.
한국의 여론과는 상관 없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과를 실천하기 위해서 1946년 3월 서울에서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국내의 모든 정당을 포함시키자는 미국의 주장과, 외상회의를 지지하는 세력만을 회의에 참가시키자는 소련의 주장이 다시 대립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파행으로 마무리되었다.
파행 직후 이승만은 1946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한국민주당은 이 주장을 찬성한 반면, 김구를 비롯한 임정출신 인사들과 중도파, 좌익세력은 반대하였다.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은 이전의 주장만을 되풀이하여 진전사항 없이 끝나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진척이 없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겨 처리하고자 했다. 미국에서 주도권을 잡고있던 유엔은 남한측이 유리하도록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부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세울 것을 내용으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임시위원단을 한국으로 파견하고, 이를 통해 통합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 당국은 이를 거부하여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했다. 북한과 소련의 입국거부에 조사조차 실패한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서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을 변경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등은 북한에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였다. 북한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규와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자와 중립적 정체세력도 받아들여 외세 군대 철수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뜻을 맞추었으나 이를 실천할 구체적 방안까지는 세우지 못하였다. 남한에서도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에서는 4.3사건이 발생하고, 10월 여수에서도 제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에 군부대가 항명하여 반란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던 민족주의자와 중도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초대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에 선출하면서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어 북한에서도 9월 9일에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남과 북에는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로써 남북 모두에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분단은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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