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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6.25 전쟁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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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4. 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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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6.25 전쟁 (한국전쟁)

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설립되어 존재하자 각기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1949년 북한의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국토완정론을 주장하면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승만은 김일성의 발언에 북진통일론으로 맞섰다. 남북의 정부는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아래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미군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러한 군비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특히 북한은 중국 내전에서 수많은 실전경험을 한 조선의용군 수만명을 군대로 편입시키고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체포된 빨치산

1949년에 들어오면서 38선에서는 크고작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군사적 충돌은 대대 또는 연대급 규모의 병력이 동원되기도 했고, 대포를 동원하거나 38선을 넘어 상대방 지역으로 깊숙히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서해안 옹진반도에서는 무력충돌이 자주 있었다. 옹진반도는 위도상으로는 38선 이남에 있었지만 바닷길로 막혀 오히려 북한과의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한 남한의 산악지형 곳곳에서 빨치산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지리산에서는 정규 군대 편제까지 갖춘 빨치산이 활동했고, 북한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해주에 훈련소를 세우고 유격대를 남한에 파견하였다. 

빨치산 처형

빨치산은 주로 밤에 산에서 내려와 관공서와 군부대를 공격하였으며 이들로 인해서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산악지대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1949년 남한의 군경이 이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서울 점령에 성공한 북한군

그러던 중 1950년 북한의 대대적인 전면공격으로 6.25전쟁, 즉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전쟁 초기 승리를 거듭하며 진격하였다. 의정부 전투, 창동 전투, 미아리 전투 등 서울 방어 축선을 무너트리며 3일만에 서울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는 전차의 유무에 따라 전투의 성패가 크게 갈린 것으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막을만한 무기가 국군에게는 없었다.  

북한군은 7월 20일 대전함락, 7월 말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국군을 밀어붙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유엔에서는 미군을 주축으로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쟁에 참가하였는데,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 되자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반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과 국군은 남한 전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하고 동부전선에선 10월 말 압록강물을 공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38선을 넘은 중공군

그러나 중국군의 전쟁개입으로 인해 전세는 다시 바뀌었다. 전세를 회복한 북한군은 북한 전역을 재수복하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4일 서울을 다시 찾는다. 전선이 38선 일대에서 밀리고 밀는 양상을 띄면서 세계 여러 나라는 휴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휴전협상이 2년을 넘게 끌었고, 그 사이 38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 대표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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