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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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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14.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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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신라의 통일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

진흥왕 이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대까지 평화와 번영, 그리고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8세기가 지나면서 신라는 서서히 기강이 무너지면서 신라 하대로 부르는 시기로 진입했다. 중앙에서는 귀족간의 권력쟁탈이 일어나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형태로 영지화 하여 주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작했다. 이 형태가 정립되면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신라 하대의 사회는 무열왕의 직계가 왕권을 움켜지고 있는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상태였으므로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왕위 계승을 두고 다시 분쟁이 일었다. 이때 무열왕의 직계인 김주원과 내물왕계를 표방하는 세력의 김경신이 경합하였고, 김경신 세력의 우세 속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김경신은 원성왕에 오르고 김주원은 명주군왕에 봉해져 오늘날 강릉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원성왕대에는 신라에서 기와집이 아닌 집이 없으며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고 전해진다. 

원성왕은 독서삼품제등을 실시하고 친국왕적 관료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했으나 귀족 연립정권 구조가 계속 유지되며 결국에는 다시 왕권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왕권은 계속 실추되었고, 왕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구조였다. 신라 하대 150년 동안 왕이 20명이나 봐뀌고, 그중 많은 왕이 내란으로 희생되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명주군왕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822년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으로 하여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김헌창의 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진압되었지만, 동요하고 있던 지방 세력이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 참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예로 청재딘의 장보고 역시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도 참가해 민애왕을 주이고 신무왕을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9세기 후반 이후로 신라의 왕정은 더욱 부패하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타락해갔다. 호족세력은 농민을 수탈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왕실은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했다. 헌강왕과 진성여왕 시대에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치와 향락 풍조로 인해 모자란 재정은 농민들에게 중과하면서 농민은 수탈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동시에 중앙 권력다툼에서 소외된 정치세력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세력을 키우면서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자연히 토지를 잃은 농민이 대거 발생하면서 국가 조세 징수 대상이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는 가난해져 갔다. 동시에 농민봉기가 각지에서 발생하며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초기의 농민항쟁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비조직적 항쟁을 펼쳤고, 산발적으로 일어났따. 이 단계에서 농민은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의 이중수탈에 항쟁하는 성격이었다. 이들은 중앙은 물론 호족세력에게도 공격을 했고 자연히 호족세력은 자체적 군사력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체적 군사력으로 농민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이들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이제 지방 세력가들은 조직적이고 독립적인 행정체계와 군사력을 갖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는 신라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흔들어 두었다. 이에 신라는 수도인 경주 일대에서만 통치력과 조세를 징수하는 매우 좁아진 지배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무장세력들은 각지에서 할거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웠고, 전란에 휩쓸린 농민들은 초적이 되어 호족에 흡수되거나 자신을 보호해줄 호족세력을 찾아서 안전을 도모하였다. 신라는 더이상 국가적 틀을 유지하지 못했고, 다시 혼란의 정국이 찾아왔다. 이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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