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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왕건의 고려와 민족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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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16.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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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왕건의 고려와 민족통일

후삼국 시대가 열린 이후로 상황은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는 고려군에게 참패하면서 상황이 안좋게 돌아갔고, 후백제는 또한 왕실 내부에서 견훤이 4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의 견훤이 왕실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의탁하였다. 견훤의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후백제는 더욱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신라의 경순왕이 935년 10월에 고려에게 항복하고 복속하면서 고려는 나주를 포함해서 후백제를 포위하는 형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경번갑의 고려군

이듬해에 왕건은 후백제와 선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결전을 벌여 후백제군을 격파하였다. 황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 완산주를 점령했다. 이로써 후백제는 건국 37년만에 멸망하고 후삼국은 고려에 의해 완전히 통일 되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이 되어준 호족에게 관직을 내리거나 왕씨성을 내렸고, 또한 유력 호족들에게는 혼인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또한 태조는 평양을 서경으로두고 평양을 경영하여 고려왕실의 독자적 세력기반으로 육성하였다. 곧 이곳은 고려왕실의 기반세력으로 타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발해가 거란의 의해 926년 멸망하였다. 이때 발해의 고구려계통 지배계층이 고려에 귀순해왔다. 태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우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려의 삼한을 통일했다는 정체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 

태조 왕건

태조의 아들인 혜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호족연합정권에 불과했던 고려국왕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혜종은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노리는 적대세력의 준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다가 재위 2년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3대왕인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식렴의 군사력을 끌어들여서 정적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종 또한 재위 4년만에 병사했다. 태조이래 고려 왕실의 숙원인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화는 계속 해서 미루어지게 되었다. 

정종의 동생 광종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왕권강화를 바라는 정종의 뜻으로 왕위에 올랐다. 광종은 즉위 초 왕권강화 기반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후 재위 11년 부터 26년 까지 약 15년 동안 호족세력을 숙청하였다. 광종의 집요한 노력으로 고려는 왕권강화라는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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