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후삼국시대의 등장과 왕건
신라 하대인 9세기 들어 신라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은 경주일대에 국한되었고 각 지방에서는 반란과 호족들의 할거로 인하여 신라는 더이상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러 반란세력들 중 국가를 세워 체계적인 조직을 정비한 곳은 견훤과 궁예였다. 이들은 각지에 산재하는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견훤은 무진주에서 농민 반란군을 흡수하여 세력을 형성했고, 완산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900년에는 후백제를 국호로 정했다. 궁예는 지금의 철원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했고, 지금의 개성인 송악 호족 왕융을 흡수하며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후에 철원으로 다시 읍을 옮기고 국호를 마진이라고 하였으나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후고구려는 특이하게 한반도 북쪽을 차지하면서도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며 후백제 후방에 영토를 가진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면서 궁예가 매우 난폭해지면서 민심을 잃자 후고구려의 장군이었던 왕건이 왕으로 추대된다. 왕건은 즉위 직후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으며 이듬해 도읍을 개성인 송악으로 옮겼다.
왕건은 송악 호족이었던 왕융의 아들로 호족적 기반에서 성장하였으며,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 등 서남해 지방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공로로 시중의 자리에 올라있었다. 신라에 대해 적대적이던 궁예와 달리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이었으며 견훤과도 초기에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920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과 초계를 공격하면서 이 우호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두 국가의 대결은 925년 조물군 전토에서 벌어졌는데, 각 군은 승부를 내지 못하고 화친을 맺고 돌아섰다.
그러던 중 927년에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친고려적인 경애왕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건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던 중 대구 부근의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왕건은 상당한 수세에 몰렸으나 930년 안동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이를 기점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격전을 거듭하며 견훤의 주력부대를 격파했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 성들이 고려에 복속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견훤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점했고, 통일을 위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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