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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춘추: 패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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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0. 12. 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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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 패자의 시대

서주의 봉건제도는 혈연에 의한 종법관계와 결합된 사회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성립 초기에는 끈끈한 혈연관계로 꽤나 결속력이 강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관계가 멀어지고 혈연적으로 소원히재면서 통치체제 전반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였다. 

왕위를 둘러싸고 각 세력간의 각축전이 진행되자 주나라는 12대 왕 유왕때 멸망하였다. 유왕은 견융, 서이등의 이민족을 동반한 반란군에 의해 죽고, 태자였던 백복도 살해당했다. 이민족 견융은 주나라 수도 호경에 눌러앉아 약탈을 벌였고 제후들은 견융을 토벌하고 호경을 되찾았다. 그후 새로운 왕인 평왕을 옹립하고 낙양으로 천도하여 동주시대를 열었다.

이를 동주라고 부른다. 멸망한 동주의 전신을 서쪽에 있던 주나라라 하여 서주라고 부른다.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가 시작된 전반의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공자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춘추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한다. 

 

동주시대를 시작한 평왕은 제후에 의해 옹립된 왕이었다. 당연히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더 이상 왕을 중심으로한 봉건적 질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를 대신한 것이 힘에 기반한 회맹질서였다. 회맹이란 제후들 중 가장 힘을 강한 힘을 가진 패자가 다른 여러 제후를 모아 한곳에서 맹약을 맺는것을 의미한다. 이는 패자가 여러 제후들에게 힘과 권위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으며 또 다른 새로운 패자가 등장해 세력판도가 바뀔때까지 중원지역의 정치 질서를 규정했다. 

제나라의 환공이나 진나라의 문공같은 춘추시대 초기의 패자들은 주 왕의 권위를 명목상이라도 빌리기 위하여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주 왕실을 보호한다는 존양왕이 명분과 주왕이 봉건해준 이상 약소 제후국이라도 함부로 병합해서는 안된다는 명분을을 내걸었다.

그러나 오랑캐라 치부하던 남쪽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이전의 명분들도 사라지게 되고, 각 제후국들은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인근의 약소 제후국을 멸망시킨 뒤 현을 설치해 자국의 영역을 확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설치된 현들은 소속된 나라의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들은 현을 자신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사적인 무력기반을 갖추었기 때문에 약소국의 병합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 수록 귀족들의 군사적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귀족들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일부 제후국에서는 이러한 갈등에 의해 권력찬탈이나 세력교체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춘추시대 사회적 계층으로는 경대부 아래에 사 혹은 국인 계층이 이었다. 이들은 본래 최하층의 지배 계층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중대사안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종법제의 원리상 시간이 지날수록 국인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더욱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주던 종법제가 무너지면서 이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면서 상급귀족들은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경제적 시혜를 주었고 이들 사이에는 은혜를 매개로 하는 새로운 결합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고나게는 나중에 고대 중국사회를 지탱하는 임협질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주로 나무농기구가 사용되었으나 점차 철기가 도입됨에 따라 후기로 갈수록 철제 농기구 사용이 빈번해졌다. 따라서 사회전반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금속 농기구의 사용으로 토양의 심경이 가능해지면서 화북지역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이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고대 중국의 통치체제가 완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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