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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오이라트의 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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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9. 1. 10.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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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의 흥기


북원이 명나라의 거듭된 원정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던중 오이라트는 예수데르를 지원하여 그를 칸으로 앉힌다. 그러나 실권과 권력은 오이라트의 수령들이 모두 틀어쥔 상태였다. 북원이 붕괴하고 동몽골에서 징기즈칸의 일족이 몰락하자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흥기의 기회를 잡았다.


본디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징기즈칸에게 복속하고 혼인을 통해서 협력한 부마 부족이었다. 그러나 징기즈 일족이 몰락하고 명나라가 나타나 북원에 대한 원정을 거듭하자 이들은 명나라에 협력하였다. 오이라트의 세 수령 마흐무드, 타이핑, 바투 볼라드는 명나라에게서 왕작을 받고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중 마흐무드의 후계자인 토곤은 다른 수령들을 통합한뒤ㅏ 오이라트를 통일한다.


그 후 오이라트의 토곤은 1434년 동몽골의 아룩타이를 공격하여 죽이고 동서 몽골 전체를 통합한다. 그는 정치적 위상을 위하여 징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톡토 부카라는 인물을 내세워 칸에 앉히고 자신은 타이시라는 직책에 앉아 전권을 장악했다. 1438년 토곤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에센에 이르러서 오이라트의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남쪽의 모굴칸국을 압박하여 실크로드의 거점인 하미를 장악했다. 모굴의 군주는 에센 타이시와 전투를 61차례나 벌였지만 한 차례 밖에 승리하지 못했다.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모굴칸국은 서쪽 일리 방면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에센의 오이라트는 동쪽으로도 세력을 펼쳐서 내몽골과 만주방면의 우량카이와 여진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장성 이북을 모두 장악하고 명과 조공무역 및 호시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 그러자 명은 오이라트의 속셈을 눈치채고 조공과 호시에 대한 세밀한 규정을 만들어서 이를 통제하려고 했다. 오이라트의 경제적 욕구에 대한 불만족은  곧 명과의 군사적 충돌로 나타났다.


에센은 오이라트의 대군을 이끌고 1449년 남하하여 대동, 적성, 요동, 감숙등지를 공격하였다. 명황제 영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토목보에서 급습을 받아서 포로가 되었다. 오히려 이 전과에 놀란것은 오이라트의 에센이었다. 에센은 황제를 돌려주는 대가로 교역상의 요구를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명 조정이 영종의 동생을 황제로 추대하고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자 에센은 하는수 없이 1450년 영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돌려보내준다. 이를 ‘토목보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에 대한 에센의 처리방식은 오이라트 인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칸을 자처하기도 하였고 이는 곧 큰 문제가 되었다. 1453년 그는 명목상 내세우던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칸임을 천명했다. 그는 스스로 몽골제국의 전통을 잇는 군주이자 칸을 자청했는데 이는 징기스 혈통을 신성시하는 몽골인들의 관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에센은 1453년 살해되고 만다.


에센이 살해됨과 동시에 토곤이 이뤄놓은 오이라트의 패권은 무너져 내리고 징기즈 일족의 주도하에 동몽골이 다시금 패권을 잡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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