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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거란제국의 후예: 서요 - 카라 키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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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2. 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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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제국의 후예: 서요 - 카라 키타이



흔히 불리는 ‘서요’ 또는 몽골인들이 부른 ‘카라 키타이’는 1125년 거란 제국이 여진에 의해 멸망하자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세력을 일컫는다. 거란 유랑민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소수의 군대와 함께 인산 산맥을 넘어서 몽골 초원으로 향했다. 톨라 강 유역의 상류에 과거 위구르 제국의 중진이었던 카툰성으로 가게 된다. 카툰성은 진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 이른 야율대석은 카툰선 인근 7주의 장관과 18부의 수령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거란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단합을 호소 했고  상당수의 유목 군대를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1130년 3월 야율대석은 1~2만명 규모의 무리를 이끌고 카툰성을 떠나 북방의 예니세이강 유역으로 향했다. 곧 이어 서쪽으로 이동하여 에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성채를 건설하여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투르판에 있던 천산 위구르 왕국의 빌게 카간에게 위구르와 거란 사이의 우호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서행을 위한 길을 내어줄것을 요청하였다. 서쪽을 향해 근거지를 옮기려던 야율대석의 행보는 카라한 왕국의 공격으로 무산될 수 밖에 없었으나 에밀에서 그의 무리는 곧 4만 여호 로 증가했다. 1131~2년경에 그는 사해의 카간이란 뜻을 가지는 구르칸으로 즉위했고 천우황제라는 중국식 칭호도 취했다.


서요, 카라 키타이의 내부적인 정립이 끝나자 야율대석은 대외 정복전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남쪽의 천산 위구르를 압박하여 부용국으로 만든 뒤  타림분지를 지배하던 카라한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카라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투르크, 거란인들이 카라 키타이에 합류했으며 카라한 군대에서 주력을 담당하던 카를룩과 캉글리 계통의 유목민들이 반기를 들고 카라 키타이에 합류해왔다. 이러한 응원에 힘입어 야율대석은 1134년 초 톈산 북방의 거점인 발라사군에 입성하여 그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다.


1137년부터는 서투르키스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서 카라한 왕조가 있었으나 셀주크투르크에 복속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의 산자르는 서부 카라한의 마흐무드와 연합하여 1141년 사마르칸트 인근 카트완 평원에서 카라 키타이 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셀주크와 카라한의 패배로 끝이 났고 야율대석은 그대로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 새롭게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거듭난 카라 키타이는 동으로는 탕구트와 접하고 동북쪽으로 나이만과 접했다. 카라 키타이 왕국은 13세기 초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권력을 빼앗길때까지 50년 가까이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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