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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유랑민의 이동과 새로운 왕국: ‘하서 위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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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2. 2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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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유랑민의 이동과 새로운 왕국: ‘하서 위구르’


위구르가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구르의 유랑민 집단은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한 남주파와 서쪽으로 이동한 서주파로 나뉘어진다.


남주파는 외게테긴을 카간으로 세우고 고비사막 이남으로 향하였다. 거기에 먼저 와있던 다른 위구르인들을 규합하여 그 세력이 20여 장에 달했다고하는데 이는 수치상으론 100만명에 해당하는 수이다. 위구르인들은 당에 식량과 물을 요구했고 당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며 대치하였다. 그러나 곧 당은 843년 위구르인들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상당수를 몰살시켰다. 이런식으로 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주파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뿔뿔히 흩어졌고 카간마저 살해당하면서 남주파는 사라져버렸다.


반면 방테긴이란 인물 휘하에 있던 서주파는 15부 10만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서진하면서 총 3갈래로 나뉘었다. 첫째로는 감주와 사주(돈황)를 중심으로 하는 하서회랑 지역에 한 갈래가 들어갔고 텐산 산맥 동부지역의 베쉬발릭과 투르판 부근에 또 한갈래, 그리고 발하쉬 호 이남의 당시 카를룩 거주지역으로 또 한갈래가 이동하였다.


먼저 서쪽으로 이동한 위구르인들 가운데서도 하서회랑의 감주(장액)에 근거지를 둔 집단을 ‘하서 위구르’라고 부른다. 이들이 하서지방으로 내려오기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티베트가 강하게 발흥한 지역이었다. 티베트는 8세기 전반부터 하서 지방 및 타림 분지 동부로 세력을 뻗쳤으나 8세기 세력이 약화되면서 하서회랑의 동부는 당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서부의 사주(돈황)에는 한족 출신인 장의조 정권이 들어섰다. 서주한 위구르인들이 티베트에 투항했다고 나오는 중국측의 기록은 위구르인들이 티베트의 영향권이던 하서지역으로 이주했음을 보고 기록한것이다.


한족 출신 장의조는 9세기 후반 하서 동부의 양주를 점거하고 그 세력을 하서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 그때 위구르인들도 이주를 해왔다. 장의조 사후 890년대부터 정권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면서 일부 정치적 공백이 생겼고 위구르 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에치나 강을 따라 남하하여 감주땅을 장악하였다. 장씨 정권은 하서지방의 서쪽에 국한되고 그 동부는 감주를 중심으로 위구르 인의 수중에 떨어져 ‘하서 위구르’로 불리게 되었다.


하서 위구르의 지배자는 중국에서 ‘가한’ 으로 책봉을 받기도 하며 여전히 카간을 지칭했다. 이들은 10세기 전반까지도 부족의 명칭을 유지하며 유목적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감주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는 산단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에치나 강을 따라 합려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 감주의 성내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장씨 정권의 뒤를 이어 하서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조씨 정권은 하서 위구르와 병존하며 때로는 긴장관계를 갖기도,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탕구트 출신의 이계천이 송으로부터 독립하여 1002년 영주를 점령하고 1026년 마침내 감주까지 함락했다. 이로써 하서 위구르 왕국의 명맥은 끊어지게 된다. 약 1세기간 명맥을 이어온 하서 위구르는 조씨정권과 비슷한 시기에 무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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