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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위구르의 부흥과 안사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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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2. 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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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부흥과 안사의난


탈라스 전투 직후 당에서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은 혼란의 시기에 접어든다.

안사의 난은 중국 화북 변경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출신 안녹산과 사사명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안녹산은 현종과 양귀비가 급히 떠난 당의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756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곧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되고 지휘권 역시 사사명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사사명도 또한 자신의 아들 사조의에게 죽으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안사의 난으로 황제가 파천하게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당나라는 이곳저곳에 군사력을 빌리기 시작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위구르이다. 위구르는 756년 말 수령 카라치가 지휘하는 2000여명의 기병을 보냈다. 이들은 유주와 태원을 치고 당의 장군 곽자의와 연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했다. 757년에는 카를룩 카간이 아들 야구브가 지휘하는 4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이들의 활약으로 거점도시인 낙양과 장안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다. 위구르의 지원 덕분에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다. 위구르의 약탈을 멈출 수 없었으며 매년 비단 2만필과 숙종의 어린 딸인 영국공주를 카를룩 카간에게 시집보내야만 했다.


762년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은 위구르에 다시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번에는 4000여명의 기병이 내려와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했다. 이번에도 위구르군은 약탈을 자행했지만 당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위구르 군이 마음을 바꿔먹었다면 당을 침략할 수 도 있었을테고 당의 수도를 폐허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구르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도 한편에 시장을 열어서 말과 비단을 바꾸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해왔다. 이는 중국을 점령하여 영토를 점유하는것 보다는 화친과 교역을 통해서 물질적 이득을 보는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에서 그런것이었다. 사실상 위구르는 당나라를 수확이 가능한 수확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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