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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전성기와 블라디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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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1. 26.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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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루시의 전성기와 블라디미르


980년경 부터 키예프를 통치하기 시작한 블라디미르는 전임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키예프 루시를 이끌었다. 블라디미르는 1015년 까지 통치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키예프 루시는 중요한 발전 몇 가지를 이루었다.

첫째로 블라디미르는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키예프 루시를 재정비하여 국내 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어서 키예프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동 슬라브족을 다시 굴복시켜 영향력 하에 넣었다.

또한 키예프 루시의 영토를 방어하고 확대하는 정치적, 군사적 결단을 내렸다.

폴란드로부터 갈리치아의 도시들을 되찾았고 북쪽으로 진출하야 야트뱌크족을 굴복시켰다. 키예프 루시의 영토는 발트해까지 닿게 되었다. 또한 블라디미르는 유목민이었던 페체네크족을 제압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다. 키예프 남쪽에 자리잡은 페네체크족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블라디미르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그들을 제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블라디미르 통치하에 넓어진 영토는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라 부를만큼 넓었다.
둘째로 블라디미르는 키예프루시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여 류리크가문의 정통성을 확립시켰다. 이는 이후 5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정도로 공고히 자리 잡았으며 지배층이 키예프 루시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가진 류맄 가문이어야만 했다.

세번째로는 기독교의 공인이다. 이는 키예프루시 국가 자체와 사회에 지속적이고 전반적인 영향을 미쳤다. 블라디미르의 몇가지 업적과 기독교 수용의 결과 키예프루시는 각각 별도로 공물을 바치던 부족 연맹체적 성격의 맹주종족에서 이제는 공통의 종교와 문화적 연결고리로 결합된 단일 지배가문을 가진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다.

▲야로슬라프 현공


그러나 블라디미르가 간과한것이 한가지 있었다. 1015년 블라디미르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은 바로 윗 세대에서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블라디미르의 통치시기에 더불어 류리크가문이 전체적인 합법성을 보유하고 키예프 루시를 통치하였지만 그 가문에 속한 인원들 끼리의 서열은 정해지지 않았다. 지배자의 정통성이 어떻게 확립되고 계승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정해진 바가 없었기에 바로 전세대 아버지의 형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도 내전을 겪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장자계승제 역시도 유교에서 나온것임을 감안하면 이들이 겪었을 혼란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각각 공물 수취를 위한 지역적 근거지를 마련하여주었고 이러한 근거지는 서로의 세력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세력을 지탱해주었기에 순탄한 왕위계승을 어렵게 만드는 한가지 요소로 작용하였다.

처음에는 장남인 스뱌토폴크가 우세하였으나 동생 야로슬로프에게 패배당하였다. 야로슬라프 현공이라고 알려져있는 야로슬라프 통치기는 전 왕의 사후 4년간 내전을 겪었고 1019년 부터 1054년까지였다. 이때는 키예프의 발전과 성공의 절정기로 칭송되는 기간이다. 안정적인 정치적 권위와 통합된 사회는 군사적 안전을 불러왔고 이는 곧 중계무역지인 키예프 루시의 번영을 이루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야로슬라프 역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는데 는 또 다른 형제인 므스티슬라프로부터 격렬하게 왕의 권위에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1026년 므스티슬라프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었다가 1036년에 키예프 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예프는 야로슬라프 현공의 치세아래 최대 영토를 영위할 수 있었다. 발트해로부터 흑해까지, 그리고 오카강입구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닿아있었고 류리크 가문은 다른 지배가문과 혼인을 맺어 그 위치를 국제질서 내에서도 공고히 하였다.

야로슬라프는 국제적 질서에서 키예프의 위치를 공고히 했을뿐 아니라 종교적 부흥 또한 한 일익을 담당했으며 키예프의 법과 교육, 건축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최초의 러시아 법전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만든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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