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 유목민의 등장
스키타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목민 집단이다.
인종적으로는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다. 스키타이에 관해서 가장 상세하게 기록을 남긴 사람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 <히스토리아>에 스키타이설화들을 수집하여 적어두었다. 또한 스키타이의 기원에 적어두었는데 이 민족은 본디 아락세스강 동쪽에 살던 민족인데 맛사게태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 북안의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킴메르인들이 캄카스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이들을 쫒아 중동지방으로 내려왔다고 적어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입증되었는데 남 시베리아 아르잔에서 1970년대 발견된 유물들은 흑해 북안의 후대 유물들과 매우 유사하여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원전 514년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왕조의 다리우스는 스키타이 원정길에 오른다. 이들은 흑해를 동쪽으로 빙 돌아서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왕국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스키타이는 이를 피해 기동성을 살려 도망간다. 결국 페르시아는 원정길에서 말을 돌려 돌아가게 된다. 당시 대제국 페르시아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스키타이는 명성을 드높였고 그리스 식민지들과 무역을 하면서 흑해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흑해 북안에 건설한 국가가 어떤국가인지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많지 않지만 우리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여 몇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영토가 동서와 남북으로 모두 20일 정도 걸리는 거리로 이루어져있다고 전한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4세기경 아테아스 왕의 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그리스에 다량의 곡물을 수출하므로서 수입을 챙겼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를 통해 도나우강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당시 그곳에는 마케도니아가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의 전투에서 패해 아테아스는 사망했고 서쪽으로의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 서쪽에서는 켈트족이 동쪽에서는 사르마트인이 흑해 북방의 초원지대로 몰려오면서 스키타이는 본격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기원전 2세기 도나우강 서쪽의 도브루자 지방과 크림반도에 세워진 두개의 소왕국을 마지막으로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흑해 북방의 초원을 지배한 스키타이인들은 주로 세가지 특징을 보이는 문화를 영유했다. 이들은 아키나케스 검을 사용하였고 그들만의 특이한 재갈과 재갈멈치를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동물장식품을 사용하였다.
동물양식의 기원은 서아시아나 그리스의 영향이라는 학설이 우세하였으나 흑해에서 동쪽으로 5000km떨어진 아르잔에서 스키타이 분묘가 발굴되었다. 이 발굴로 인해 흑해연안에서 나타나는 스키타이 문화는 이미 시베리아 남부 미누신크스 지방에서 형성이 되었고 흑해북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리스영향을 받았다는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는 흑해 북안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중앙 유라시아나 초원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또한 중국 북방과 한반도로 유입되어 고대 신라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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