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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유럽의 일본 진출과 문화의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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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0. 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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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일본 진출과 문화의 유입]



15세기 후반 ~ 16세기에 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서서히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지중해와 중동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차지하고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은 유럽과 아시아를 직접 잇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무역을 확대하고 식민지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 일본인과 서양인의 접촉을 주제로 하여 그린 오사카성의 <남만병풍> 


1543년 포르투갈인이 타고 있는 중국국적의 선박이 규슈다네가시마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과 일본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다네가시마의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가는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화승총을 구입하고 그들에게서 제조법과 운용법을 전수 받았다.

도키타가는 가신들에게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하여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었고 이는 곧 일본 전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마전법에서 보병전법으로 전술적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이 시작되면서 기독교 또한 포교를 시작했는데 1549년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무역과 선교는 한개의 몸처럼 움직였으며 다이묘들은 선교사들에게 협조하였다. 특히 규슈와 주코쿠 지역에 포교가 두드러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만명에서 많게는 이만명까지 신도를 확보하였다.


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프로이스의 교토거주를 허락하고 76년에는 교토에 남만사를 건립하도록 허가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때문에 기독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것은 불교로 대표되는 중세적 종교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부나가의 권력을 이어받은 히데요시 역시 처음에는 기독교에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인이 노예로 매매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히데요시는 유럽과 교역은 계속하되 선교사에게 해외추방령을 내리고 나가사키를 회수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이 영토확장과 식민지획득에 이용된사는 사실을 듣고 1596년 스페인계 프란시스코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와 신자를 체포하여 나가사키에서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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