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리가 드레블랴네족의 손에 의해서 갑자기 죽었을때 그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의 아내인 올가가 키예프의 섭정이 되었다.
올가 - 키예프 대공비
러시아 역사에서 여자로서 최초로 지배자의 계급에 오르는 올가는 945년 부터 962년 까지 키예프를 통치한다.
[원초연대기]는 올가의 다양한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들은 주로 드네블랴족에 대한 복수와 키예프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동슬라브족들에게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올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의식과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키예프 루시와 비잔티움 사이의 정치적 및 상업적 관계가 강화됨을 의미했다.
국가를 대상으로한 개종이 아닌 개인적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기독교가 러시아에 도입되는데에 기여했기 때문에 나중에 올가는
'사도들과 동등한'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스뱌토슬라프 1세(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 942년경 ~ 972년 3월)는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재위: 945년 ~ 972년)
올가 이후에 어머니로부터 권략을 이양받은 스뱌토슬라프는 962년부터 972년까지 키예프 루시를 다스렸다.
이때는 '위대한 모험'으로 불리우며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스뱌토슬라프는 다양한 군사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 범위는 콘스탄티노플부터 볼가강과 카스피해를 아우르며 이 지역 전체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스뱌토슬라프는 전형적인 전쟁군주로서 964년에 동방원정을 시작하여, 다양한 슬라브족, 핀족, 투르크족을 정복하고
볼가 불가르의 수도를 약탈했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했고 하자르의 수도를 약탈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하자르국은 반세기 이상 더 유지되기는 했지만 곧 사라지게 된다.
스바토슬라프는 967년에 키예프로 돌아왔다. 스뱌토슬라프의 동방원정은 동남쪽 다양한 집단들을 통합했고, 볼가강 전 유역을 차지했으며
카스피해의 교역망을 완전히 키예프의 수중에 넣게 되었다.
11세기 키예프 루시의 영토범위
스뱌토슬라프가 서쪽으로도 기수를 돌린것은 비잔티움의 황제인 포카스의 제안때문이었다.
968년에 스뱌토슬라프에게 불가리아를 습격하면 금으로 보상하겠다고 제안을 해왔는데 스뱌토슬라프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뉴브계곡에 있는 불가리아국을 공격하기 위해 발칸으로 진입한 스뱌토슬라프는 다시 한번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불가리아국의 수도를 장악하고 통치자 보리스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스뱌토슬라프의 군사적인 성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불가리아국의 수도를 장악하며 다뉴브강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한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를 다뉴브강과 볼가강을 모두 아우르는 큰 국가로 성장시켰는데 이러한 영향력 확대에 비잔티움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군사지도자로 유명했던 비잔티움의 트지미스케스황제에 의해 루시인들은 비잔티움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971년 봄에 치뤄진 전쟁은 키예프 루시의 패배로 일단락 되었다. 스뱌토슬라프는 한여름에 마침내 비잔티움과 강화를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강화 조건으로는 키예프 루시는 앞으로 비잔티움 제국에 도전하지 않으며 발칸을 포기한다는 조건등이 들어가 있다.
굴욕적 강화임에도 키예프의 교역로가 필요했던 비잔티움은 교역할 수 있는 권리는 보유하게 해주었다.
비잔티움과의 강화를 맺고 돌아오는 길에 스뱌토슬라프는 페네체크족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페네체크족 칸은 스뱌토슬라프의 두개골에 금을 입혀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 사후 세명의 아들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이는 키예프의 왕위계승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3형제중 막내인 블라디미르가 형들을 물리치고 왕위를 이었으며 980년경에는 키예프 영토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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