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러시아사 - 키예프루시의 등장(10세기)

TimeMap Project

by 에이구몬 2018. 7. 9. 13:24

본문

반응형

키예프국의 등장

 

키예프 시(市)는 아마도 9세기 하자르족에 의해서 통치되었던 동슬라브 인들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올레크라고 불리던 바랑기아인이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비잔티움의 중요한 시장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앞서 말했듯 키예프는 주요 교역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는 아주 지극히 중요하고 정상적인 사항이다. 올레크는 공으로서의 계승권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류릭이라는 인물의 아들인 이고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이고리는 올레크가 죽은 913년에 권좌에 올랐다. 이들이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초기 발전과 팽창에 있어서 올레크가 핵심적인 통치자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관련 이미지

드루지나 - (druzhina) 군대의 일부를 담당했던 군주의 가신(家臣)세력

올레크는 드루지나(druzhina)라는 가신(家臣)들의 도움을 받아서 폴랴네족의 영토는 물론이고 이웃 동슬라브족의 영토를 자신의 지배영토로 편입했다. 이러한 영토의 확대에 대해서 드레블랴네족이 보여준 격렬한 반발은 우리에게 문헌으로서 내려온다. 몇몇 다른 종족들은 키예프시에 별다른 저항없이 굴복했던 것 같다. 키예프에 대한 충성의 징표는 주로 공물이었다. 그러나 어떤 종족은 키예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올레크의 동료인것처럼 행동 했을 수도 있다. 올레크는 말년인 907년에 상당한 병력을 소집하여 비잔티움 원정을 성공시켰다. 러시아측 연대기에는 이 승리가 대단히 과장되게 서술되어있다. 그러나 비잔티움측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하지만 키예프 루시가 승리를 거둔 것은 이 두나라가 맺은 조약을 통해 알 수 있다. 올레크는 911년에 교역과 관련된 아주 유리한 조약을 비잔티움과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고르 (912-945) 
*출처:http://goodline.spb.ru/en/igor/

올레크의 계승자인 이고리공은 913년부터 사망년도인 945년까지 키예프 루시를 통치했다. 그에대한 지식은 그리스와 라틴자료, 그리고 러시아 자료에서 얻을 수 있다. 반전설적이며 신화적 인물인 올레크에 비해서는 충분히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서 눈에 띈다. 게다가 이고리는 다른 동슬라브족과의 영토전쟁에서 키예프의 권위를 유지하고 확대할 뿐 아니라, 드레블랴네족과 싸워야 했다. 그의 권위는 아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것이였다. 따라서 새롭게 공으로 즉위 한 자는 전임자가 해놓은 키예프의 권위에 관련된 사항들을 반복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고리는 941년에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대상으로 중요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 함대는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는 비잔티움 함대에 패해 944년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된다. 조약의 내용은 911년에 체결된 조약보다 키예프 루시에 불리한 사항이었다.

이외에도 루시인들은 943년에는 카스피해 너머의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의 몇몇 지방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고리는 945년에 자신의 영토내에서 공물을 거두는 도중에 드레블랴네인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ê´€ë ¨ 이미지

10C의 비잔티움 제국

올레크와 이고라가 비잔티움과 체결한 조약은 세심히 살필 가치가 충분하다. 조심스럽게 작선된 조약의 문구와 놀랍도록 세세한 조항들에서는 루시인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체류문제, 주민들과 루시의 교역, 그리고 일반적으로 양국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특히 비잔티움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교역이 중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비잔티움은 세계의 중심이라 할정도로 중요한 곳이었기에 루시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중심지를 키예프로 옮기려는 동기를 부여받았던 것 같다. 라서 그 이후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대외정책은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와 동시에 스텝지대의 주민들은 계속해서 신생 키예프국을 위협했다. 하자르국은 여전히 강국이었는데 키예프의 통치자들은 하자르인들의 영토 안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고 이는 거듭된 무력충돌을 초래했다. 하자르국이 안정된 경쟁세력이었다고 한다면 서쪽으로는 다양한 반유목부족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이들은 하자르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9세기 말에는 파노니아 평원으로 들어가 헝가리를 건설하기 위한 토대를 닦았다.



Kyivan Rus 980-1054

키예프 루시의 영토(980-1054)

그러나 그들은 10세기 중반에는 동쪽에성온 투르크계 페네체크족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고 대부분 남부 러시아를 떠났다. 이들은 하자르족이 쇠퇴한 이후인 10세기 후반에 키예프국을 끊임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