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문화는 석기에 머무르던 서일본 지역에 금속기를 가져왔다. 청동기와 농사를 통한 생산력 증대는 지역세력의 결집을 가져왔다.
필연적으로 타 세력에 대한 견제와 정복활동이 이어졌으며 이는 무기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철기는 이미 거대 세력화한 북부 규수의 세력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가야와의 긴밀한 공조는 철기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더욱 확실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또한 가야는 철의 최대 수출국이기도 했다.
철기의 일본 전래는 지배구조가 고도화 되는데 그 역할이 있다 하겠다.
당대 철기와 더불어 북부규슈의 세력들은 중국과도 외교적 연결이 있었다.
중국에서 전래되어온 청동 거울들은 규수 귀족들의 세력을 과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왜는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학자들은 당시 낙랑등 한군현과 교류하고 있던
가야를 통해 긴밀한 관계가 형성 되어 있을것이라 추측했다.
왜 - 가야 - 한군현 - 중국 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가 당시에 형성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것이다.
전한의 광무제의 인이 현재의 규수의 북부인 노국(奴國)까지 오려면 이러한 국제관계 속의 네트워크가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것이었다.
북부 규수에서 출발한 사신은 현재 한반도의 가야를 통해 한반도로 진입하고 육로를 통해서 북상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서해를 가로지르는 항해는 할 수 없었다. 김해로 진입한 사신은 육로를 따라 가야 영토와 낙랑의 영토를 따라 들어가
한나라의 육상통로를 이용해 낙양까지 갔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긴밀한 공조가 없이는 이뤄지기 힘든것은 자명한 일이다.
북부규수에서 출토된 청동거울과 사엽좌금구
이러한 추측을 뒷바침하는 고고학적 유물은 실제 북부 규수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규슈 후쿠오카현 가스가시에있는 스구오카모토 유적에서 1899년에 옹관묘가 발굴되는데, 이 관안에는
30개 이상의 전한시대의 거울과 동검, 동모등이 들어있었. 당시 이 유적 부근에서는 청동기의 주형이 대량 발견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여 이 옹관묘는 노국(奴國)의 왕이 잠든 묘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또한 1822년에 발견된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미쿠모미나미쇼지 유적의 옹관에서는 전한시대의 거울 35개와
금동제 사엽좌금구등이 출토되어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이도국왕의 무덤이라 추측되고 있다.
청동거울이나 중국에서 유래된 물건들은 소지자에게 정치적 위엄울 부여해주고
세력과시를 통해서 타 세력을 견제 또는 흡수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철기와 의제용 청동기들은 권력자에게 더 큰 권한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흡수된 세력들을 통해
고대문화를 꽃 피우게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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