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命篇
전편(前篇)의 천명편(天命篇)에서는 선악의 주관자로서의 하늘을 말하였고, 이 순명편에서는 글자 그대로 그러한 하늘의 명(命)에 순응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일견 이 순명편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고 다만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생(生)을 맞아야 한다고 서술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은 역시 하늘의 이치,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지 말고 자신의 생(生)을 개척하라는 조언일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알지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쫓다가 자신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는 일도 종종 보게 되니 말이다.
子夏曰, 死生有命, 富貴在天。
자하께서 말씀하셨다. 생사(生死)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요, 부귀(富貴)는 하늘에 있는 것이니라.
(字義) ○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학문에 뛰어났다. ○死生처럼 중국말과 우리말의 순서가 뒤바뀐 예가 많다. ○A(명사)+有+B= A에 B가 있다. 有+A= A가 있다. 물론 有앞에 有를 한정하는 부사가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必이 자주 쓰이며, 계선편 9번째 글귀에서도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A+在+B= A가 B에 있다. “있을 在”와 “있을 有”는 그 쓰임새가 다르므로 확실히 구분하기 바란다. ○富貴在天; 부귀는 하늘에 있다. 즉,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
만사가 나뉘어 이미 정해져 있거늘, 부생(덧없는 삶)이 공연히 스스로 바뻐하느니라.
(字義) ○이 문장은 2.3 2.3으로 끊어 읽는다. ○已는 이미 이. ○浮는 뜰 부. ○生은 여기서는 명사로 쓰였다. ○浮生(부생)은 한 단어로 “덧없는 인생”을 뜻한다. ○空(공)은 부사로 “헛되이, 공연히”의 뜻이다. 空然히. ○自는 술어와 붙어서 잘 쓰인다. ①自+자동사 : 스스로 ~하다. 저절로 ~하다. 自動, 自述, 自首, 自白, 自祝. ②自+타동사 : 자기를 ~하다. 스스로를 ~하다. 自殺, 自決, 自尊心, 自責. 참고로 己(자기 기)는 명사로 쓰이므로 목적어가 될 때는 “술어+己”의 어순이 된다. ○忙은 바쁠 망. 忙中閑(망중한; 바쁜 가운데의 한가로움), 公私多忙(공사다망; 공적, 사적인 일로 아주 바쁨)
景行錄云, 禍不可以倖免, 福不可以再求。
경행록에 이르기를, 화는 요행히 면할 수 없는 것이요, 복은 두 번 얻을 수 없느니라.
(字義) ○“可以+술어”는 관용구로 “~할 수 있다”의 뜻이다. 따라서 “不可以+술어”는 “~할 수 없다”의 뜻이다. ○倖은 부사로, 요행히 행. 다행 행. 참고로, 술어나 명사로 쓰일 때는 주로 幸자를 쓰고, 부사로 쓰일 때는 여기서처럼 倖자를 쓴다. 幸福(행복), 幸運(행운), 多幸(다행).
時來, 風送騰王閣, 運退, 雷轟薦福碑。
때가 오면, 바람이 등왕각으로도 보내주는 것이요, 운수가 퇴락하면 우레가 천복비를 우르릉 부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字義) ○이 문장 역시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걸 파악하는 것이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轟은 울릴 굉. 수레소리나, 천둥소리를 나타낸다. ○이 글은 다음의 고사를 알아야 이해가 된다. 당나라때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왕발”(王勃)이란 사람은 마당산 신령의 현몽을 얻어 순풍을 만나 배를 타고 하룻밤 사이에 남창 칠백리를 가서 등왕각의 서문을 지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천복비에 대한 고사는 구래공의 문객 중 한사람이 지극히 곤궁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천복비의 비문을 박아다가 주며는 그 사례를 후히 준다고 하였다. 이에 천신만고하여 수천리를 애써 갔더니 그날밤 벼락이 내려 그 비석을 깨뜨렸다는 일이 있다.
列子曰, 痴聾痼啞家豪富, 智慧聰明却受貧, 年月日時該栽定, 算來由命不由人。
열자께서 말씀하셨다. 치롱고아라도(어리석고, 귀먹고, 고질에, 벙어리라도) 집은 호화롭고 부유할 수 있으며, 지혜총명이라도(지혜가 있고 총명해도) 오히려 가난할 수 있느니라. 연월일시는 두루 갖추어 정해져 있는 것이니, 셈은 천명에서 말미암는 것이지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니라.
(字義) ○4.3 4.3으로 끊어 읽고, 역시 대칭구조를 파악하면 이해하기 쉽다. ○痴는 어리석을 치. 痴는 속자이고, 본자(本字)는 癡이다. ○痼는 고질 고. ○啞는 벙어리 아. ○却은 지금은 주로 “버릴 각”의 술어로 쓰이지만, 한문에서는 부사로 더 많이 쓰인다. 즉, “도리어, 오히려”의 뜻이다. ○該는 모두 해, 갖출 해. ○栽(심을 재)는 裁(마름질할 재)의 뜻으로 쓴 것 같다. ○算은 수 산. 셈할 산. 여기서는 운수를 따져본다는 뜻이겠다. ○由는 말미암을 유. 由+명사= ~에서 말미암다.
順命篇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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