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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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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3. 1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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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명성왕후

러일전쟁 승리 이후 1894년 조선에서 일본의 입김아래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난 명성왕후는 러시아를 등에 업고 일본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정부세력이 아닌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러시아공사관, 현재는 우측 첨탑만이 남아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종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일본에 의해 위협받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대피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무는 동안 이를 비판하는 국내의 세력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고종은 1년만에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왕을 황제로 격을 높여 불렀다. 그리고 지금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원구단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선언했다. 이에 개화파 일부는 군주권 강화를 위해 광무개혁이라는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따. 

광부개혁은 옛것을 고쳐 새로이 한다는 구본신참 정신아래 진행되었다. 양반이나 유생, 지주 같은 구 봉건제 아래에서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온건적인 개혁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면서도 개혁방향은 군주권 강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우선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황제에게 군대 통수권과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조약 체결권 등 정부의 주요 권리를 부여하였고, 이와 함께 사회 경제적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배부하면서 민생 안정과 국가재정 확보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당시 외국 자본을 통해서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고 기술학교를 세우는 등 의도대로라면 근대국가 건설에 부족함이 없을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기존의 관리와 지주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진행된 소극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에 농민층의 토지분와 같은 요구는 반영되지 못했으며, 추진된 개혁도 추가적인 유지 정책이 뒷바침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회성 정책에 그쳤다. 더구나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던 산업정책 역시 결국 국내 경제를 외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큰 어려움이 직면하였다. 

독립문과 영은문

 

민간에서도 개혁정책이 일어났다. 개화파 인사들은 정부 내 일부 관료들과 함께 계몽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중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주국으로 당당히 서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중국 사신이 지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현재의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운은 당시 영은문을 허물고 지어진 독립문이다. 또한 그들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고종의 환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대중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의회설립과 사법제도의 근대 개혁을 주창하고, 산업의 육성을 주장했. 

만민공동회

독립협회는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라는 대중 집회를 개최하였다. 많은 사람이 만민공동회에 입회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다. 당시 장소는 현재의 종로 1~3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산업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우호적이었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보고 의회 설립과 사법제도, 재정 개혁 등에 합의 하였으나, 독립협회의 활동이 대한제국 황제권에 위협을 가한다고 판단하여 황국협회를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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