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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조선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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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3. 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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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조선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외교와 통상, 군사업무를 추진하는 개화 추진기구를 설치하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여 서양의 앞선 군사기술을 배우려 했다. 또한 청과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조선에 내정간섭하는 청을 희화화 하는 만평

조선의 개화정책은 기존의 척화에서 돌아선 것으로 최초의 개화정책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 할 만 하나, 조선의 개화는 봉건적인 토지 제도나 신분제도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기존의 사회구조 틀에서 이루어진 제한적인 개화였다. 이는 사회의 주 근간인 농민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지배층인 양반 유생들은 정부의 개화 정책이 자신들의 기본 신분제도인 반상제를 무너트릴 것이란 염려에 개화를 반대하였다. 동시에 군에서도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별기군에 비해 턱없이 낮은 봉급을 받던 구식 군인들은 1년 넘게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달치 봉급으로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이들은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다. 1882년 6월 벌어진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곡물가격의 상승으로 고통받던 도시 하층민들이 폭동에 가담하면서 큰 사건으로 변화하였다. 군란에 참여한 이들은 외척세력인 민겸호와 민씨 일파의 집을 부수고 개화파 관료를 공격하였다. 

개화파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인 흥선대원군을 불러 정권을 맡겨서 이들을 달래려 하였다. 사태가 수습되는 듯 했으나 민씨 일파의 요청을 받은 청군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청군에 의해 납치되고 민씨일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후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던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일이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의 간섭이 본격화 되면서 개화 정책은 크게 후퇴하였고 개화파의 개혁이 청군을 등에 업은 민씨세력에 의해 거부되면서 개화파의 입지가 좁아졌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청불전쟁

그러나 청과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나 조선에서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였다. 개화파는 이를 기회로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청군과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1884년 10월 개화파는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서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적은 병력으로도 궁을 수비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기고 일본군과 조선군으로 하여금 경비를 지키게 하였다. 이를 갑신정변이라고 한다. 정권을 잡은 개화파는 행정과 재정제도를 일본식으로 개혁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일련의 개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남아있던 청군의 반격으로인해서 수세에 몰리게 된데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이 약속을 저버리고 철수하면서 결국 정변은 사흘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를 삼일천하 갑신정변이라 한다. 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 관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청과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 시켰다. 그러나 정변을 진압한 청의 내정간섭은 여전히 조선에게 행해지고 있었으며 일본도 조선에 개입할 명분을 계속 찾으며 기회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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