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표트르대제와 대북방전쟁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참여해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발트해와 발태 지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대(對)스웨덴 군사동맹의 동맹국인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작센과 스웨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더욱이 스웨덴의 왕 칼 12세가 1697년 불과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대스웨덴 군사동맹은 스웨덴을 공격할 시기를 저울질했다.
표트르 대제가 오랫당온 질질 끌던 투르크와의 평화협상을 마무리 짓던 사이 폴란드-작센의 아우구스투스 2세는 1700년 1월에 스웨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몇달뒤에는 덴마크가 뒤를 따랐다. 러시아 인들은 투르크와의 조약을 마무리하고, 8월 19일 스웨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쉬워보이던 스웨덴과의 전쟁은 난관에 봉착했다.
스웨덴의 칼 12세는 대담하게 해협을 건너서 덴마크의 심장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덴마크로부터 빠르게 항복을 받았다. 그 후에도 스웨덴은 빠르게 움직였다. 1700년 11월 30일에 군대를 발트해 건너 리보니아로 이동시키고 나르바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러시아 주력부대를 급습했다. 스웨덴군은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약 1만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사망했고 나머지 3만명은 대포도 버리고 급히 후퇴했다.
그 상태에서 칼 12세가 러시아로 진군하여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으면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 12세는 모스크바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폴란드의 아우구스투스 2세를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평가하고 폴란드를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6년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표트르는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나르바 전투의 참패 이후 육군과 포병대를 준비시켰다. 국가의 행정, 재정 및 기반 사항이 한계점에 다다랏으나 표트르는 아랑곳 하지 않았고, 교회의 종을 녹여서라도 대포를 만들었다.
표트르는 재건된 군대를 두가지 방향으로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원군을 보냈고, 일부는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 쪽을 향해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셰레메테프는 1701년 1702년 두번에 걸쳐 스웨덴의 약한 부대를 물리치면서 이 지역을 유린했다. 동시에 러시아 인들은 핀란드 만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1703년에는 네바 강 입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자리를 공고히 잡았다. 여기에 크론시타트 섬에 요새를 건설했고, 나르바 요새 자체를 점령했다. 발트해에서 해군을 창설해야 육해군 동시 작전이 가능했기에 해군을 설치하고 보병 교련을 기초하여 근대식 군제를 구성했다. 그래서 새롭게 건조된 배가 발트해에서 활약 할 수 있었다.
폴란드의 아우구수투스 2세가 막다른 곳에 밀려 칼 12세와 알트란슈태트 조약을 맺었고, 이제 표트르 대제는 칼 12세와 단독으로 맞서야 했다. 스웨덴 왕은 1708년 1월에 러시아를 대상으로 결정적인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스웨덴 군대는 5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비스툴라 강을 건너 모스크바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당시 러시아는 반란으로 대내적으로 매우 상황이 혼잡했다. 아스트라 한에서 수도사와 소총병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고, 돈 카자크 불라빈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란은 남부 러시아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고 반란군의 수는 10만명에 이르렀다. 러시아 정부군은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했고, 1709년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스웨덴은 1708년 계속 모스크바로 계속 진격했어야 헀다. 그러나 칼 12세는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휴식을 취했고, 러시아 장군 멘시코프가 신속히 대응하고, 우크라이나는 스웨덴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칼 12세가 남쪽으로 남하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졌는데, 이 보급선을 차르의 군대가 공격하면서 증원군과 보급마저 막혔다. 스웨덴군은 보급품과 인원부족에 시달렸으며 폴타바에서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던중 요새를 구하러 온 러시아 군대와 마주쳤다.
1709년 7월 8일에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4만명 이상의 러시아군에 비해 2만에서 2만 8천명 사이의 스웨덴 군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장군을 포함한 스웨덴군 대부분은 들판에서 항복하거나 드네프르 강 근처로 도망갔다가 항복하였다. 칼 12세는 투르크 영토로 도주했다.
러시아의 지휘력, 훈련, 사기, 효율성은 예전 나르바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그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스웨덴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이번에는 스웨덴군을 완벽히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 - 조선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둘러싼 내부의 갈등,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0) | 2022.03.07 |
---|---|
[한국사] - 조선의 개항과 불평등조약의 시작. 강화도조약 (0) | 2022.02.28 |
[한국사] - 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개항 (0) | 2022.02.22 |
[한국사] - 조선의 세도정치와 흥선대원군의 등장 (0) | 2022.02.21 |
[한국사] - 조선의 붕당 정치 (0) | 2022.02.0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