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침탈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갈수록 심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신들의 실익에 따라서 러시아와 일본의 편에 서서 서로를 지지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의 편을 들었고, 영국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편들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게 조선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필리핀에서의 영향력을 상호 확증받았다. 영국의 경우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가장 먼저 일본의 조선침략을 인정하였다.
1904년 일본군이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에게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년 넘게 육지와 바다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 육군은 1904년 5월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이후 8월에는 요양에서, 10월에는 사하회, 1905년 1월에는 흑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여순을 함락시켰다. 당시 러일전쟁에는 기관총이 동원되어 그 위력을 나타내었다. 물론 일본군은 몸으로 기관총의 위력을 상쇄시켰다. 1905년 3월 봉천에서 열린 대규모 전투에서 일본은 대규모 희생 끝에 승리를 거두어 러시아 제국을 코너로 몰아 넣었다. 러시아는 육지에서 세력이 불리하자 북유럽 발트 해에 있던 함대를 해전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는 영국의 견제로 인해 지구를 한바퀴 돌아 동해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거의 6개월만에 발트해에서 대한해협까지 왔으나, 일본 해군에 의해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과 러시아는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와 보호, 요동에 대한 조차권과 철도 부설권을 인정 받았다. 이보다 조금 앞선 1905년 7월에는 미국도 일본과 비밀 협정을 맺어 필리핀 점유권을 인정받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했다. 일본은 결국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하고 남만주 진출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중국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한반도에 주둔중인 일본군은 압력을 넣어 대한제국의 영토와 교통, 통신시설을 일본에게 제공한다는 의정서를 체결하게 하였다. 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자 일본은 1차 한일협약을 통해 외교와 재정 분야에 일본이 추천한 고문을 채용하게 하고, 이를 통해 내정에 간섭하였다.
러일 전쟁의 결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위협해 외교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하는 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맺었다. 이 조약이 바로 유명한 을사조약이다. 1905년 맺어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입법, 사법, 군사권 등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조선 침략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던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폐위시키고 정부 각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뒤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1907년 체결된 한일 신협약은 정미조약으로도 불린다. 군대권과 더불어 경찰권, 감옥 사무권까지 빼앗으며 주요 행정업무를 모두 장악했다. 이러한 준비 작업을 바탕으로 1910년 8월 29일 완전히 조선을 병합하며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곧 대한민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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