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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난 -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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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1. 1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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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난 -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

고려가 금에 군신관계를 받아들인 이후 고려 사회는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그 안정 속에서 고려의 최고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어 갔다. 문벌 귀족은 과거나 음서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유력 가문들은 서로의 혼인관계로 자신들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폐쇄적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자신이 사유화 하였다. 이때 문벌귀족들은 섬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섬에서 가축을 풀어두고 그때그때 활로 잡는 등의 사치를 부리기도 하였다. 

당시의 문벌귀족은 경원 이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남평 문씨, 강릉 김씨, 평산 박씨 등이 대표적인 문벌 귀족가문이었다. 특히 인주 이씨는 문종대부터 인종대까지 80년간 5명의 왕에게 9명의 왕비를 들이는 최고의 외척가문이었다. 이들은 왕실을 등에 업고 외척가문으로 권력을 휘둘렀고, 나아가 왕위계승에도 영향력을 끼쳐 다른 귀족들과 충돌이 잦았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인주 이씨 가문은 더욱 막강해졌다. 인주 이씨 가문의 실력자인 이자겸은 인종의 아버지 예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였고, 인종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자신의 딸들을 다시 인종에게 비로 들여 왕실 외척 가문의 정점을 이루었다. 인종도 이자겸을 대우하여 땅과 하사품을 내렸다. 이러한 인주 인씨 가문에 대한 편애와 권력독점은 타 귀족가문의 반발을 불러왔다. 

문벌귀족

1126년 인종의 측근인 김찬과 안보린, 지록연등은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을 제거하고자 병력을 일으켰다. 그러나 척준경의 동생과 아들만 이들에게 희생되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이자겸은 바로 반격에 나서 궁궐을 불태우며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이자겸은 반대파의 배후에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인종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였고, 결국 내분으로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귀족에서는 경주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묘청과 김부식

묘청의 난은 이자겸의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1135년 이자겸의 난 이후 흉흉해진 민심으로 인해 서경출신의 묘청이 풍수도참설을 기반으로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사항을 유포시켰다. 이들은 서경천도를 성사시키고 이를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또한 북방의 강국으로 떠오른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하면서 자주성을 표면에 내세우며 민심을 이끌었다. 김부식 등 개경 문벌 귀족의 반대가 거세졌다. 천도가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좌절되자 군사력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였다. 그리고는 묘청세력은 자비령을 차단하고 국호를 대위라 하며 국가를 선포했다. 고려정부는 김붑식을 총사령관으로 토벌군을 보냈고 1년여 만에 겨우 이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은 모두 소수의 문벌귀족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어 나타난 사건이었다. 귀족들은 왕권의 약화와 권력 집중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고, 고려의 문벌 귀족 중심 사회는 더더욱 모순을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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