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2제국(679-744)과 부흥
돌궐인들은 비석에 투르크 문자를 새겨 남겨두었다. 돌궐의 비문 곳곳에는 중국의 위험에 대해서 경계하는 모습과 당나라가 지배를 했던 50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당은 동돌궐과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며 서역지배체제까지 완비하게된다. 당에 복속한 돌궐에 대해 당은 간접 지배체제로 돌궐의 수장들을 내세워 돌궐을 통치한다. 서돌궐이 당에 멸망한 657년 이후 약 20년 뒤인 679년에 내몽골에서 돌궐 수령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아사나씨에 속하는 니숙복이라는 인물을 카간으로 추대하여 주변 24주 돌궐 수령들이 응하고 수십만에 달하는 인원이 이 반란에 참가하였다. 또한 680년 아사나씨의 복념을 카간으로 추대하고 당에 반기를 든 사건이 또 일어나기도 하였다.
두번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두 시도는 돌궐부흥운동에 불씨를 일으켰다. 682년에 이르러 아사나씨의 쿠틀룩이라는 인물이 거병하여 내몽골의 초가이 산지와 카라쿰에 근거를 두고 흩어진 돌궐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쿠틀룩은 스스로를 일테리쉬 카간이라고 칭했다. 이는 돌궐을 처음 일으킨 투멘이 사용했던 일테리쉬와 같은 명칭인데, 일(il)은 나라를 뜻하고 테리쉬(terish)는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모은 카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일테리쉬 카간은 카라쿰에서 고비사막을 건너 북상하여 686~687년 동돌궐의 근거지였던 외퇴켄으로 돌아갔다. 일테리쉬 카간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북초르(묵철)이 카간을 계승하여 카파칸 카간이 되었다. 그의 치세에 돌궐 2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동쪽으로는 거란과 해를 격파하여 싱안링 산막의 경계를 되찾았고 북으로는 바이칼호의 바이쿠르를 격파하였다. 또한 서역의 타림분지 너머인 철문까지 도달하였다.
당시 당의 지도자 측천무후는 695년 카파칸 카칸을 천선가한으로 책봉하며 대외적으로 돌궐보다 위에 당이 있다는 모습을 보이려 했으나 카간을 제어할 힘이 당나라엔 없었다.
오히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당의 지배에 반기를 들자 카파칸 카간은 당에 협조를 자청하여 거란을 공격했다. 이러한 전성기를 이끈 카파칸 카간은 716년 바이르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다가 피습을 당해 죽고 말았다.
카파칸 카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을 붕괴 위기로 몰고갔지만 뒤이어 나타난 빌게 카간이 나타나 내분을 진정시키고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741년 이낼카간이 사망한뒤 돌궐 내부의 갈등과 부족들의 이반으로 인해서 제국은 혼란스러웠고 곧 카간들이 살해, 폐위 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결국 744년 위구르, 바스밀, 카르룩 세부족의 연합공격으로 외퇴켄이 무너지면서 제국은 붕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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