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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동아시아의 유목국가 흉노와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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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1. 2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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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유목국가 흉노와 만리장성




최초의 유목국가인 스키타이가 나타난뒤 3세기 정도가 지난 뒤 유라시아 동부에서도 유목국가가 나타난다. 사서에 나타나는 첫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타나는데 기원전 318년에 진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였다는 기록이다. 중국 측에 따르면 은주 시대 이래 흉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목민족은 계속 존재해왔고 중국 북방에 위치해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이들이 흉노와 직접적, 간접적 연관성이 있다는것은 입증이 되지 않았지만 고대 동아시아에서 전국시대 중국과 흉노는 적대적이든 우호적이든 교류가 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은주 이래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방에 살던 여러 민족들은 주로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을 기반으로한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새로운 민족이 등장했다. 중원 사람들은 이들을 가르켜 호(胡)라고 불렀다.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부족이나 국가를 가르키는게 아닌 유목적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넓은 범위를 가진 단어였다. 따라서 동호, 임호,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호(胡)의 출현은 곧 장성의 축조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의 말을 이용한 기동성은 정주생활과 보병전에 익숙한 기존 전투방식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웠고 대기마전을 위한 방법으로 장성이 고안되었다. 동쪽의 연에서부터 서쪽의 조까지 전국시대 북방과 국경을 맞댄 몇몇 나라들은 성벽을 쌓고 새로 출현한 기마민족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


이후 진이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이 각각의 성벽들을 연결하고 보수하여 만리장성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이때 흉노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5년 몽염에게 10만의 병사를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하였다. 흉노의 지배아래 있던 황하이남의 오르도스 지방을 점거하는등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는 흉노가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시련을 준것에 불과했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흉노는 근거지를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묵특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고 진시황이 사망하게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진시황 사망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흉노의 권력을 장악한 묵특은 주변의 크고 작은 유목집단들의 서열관계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동쪽의 싱안링 산맥의 동호를 급습하여 복속시키고 서쪽의 월지를 공격하여 그들을 중앙 아시아로 밀어냈다. 남쪽으로는 오르도스 지방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진나라에 빼앗겼던 오르도스지방을 다시 수복하였다. 북쪽 바이칼호 방면으로는 혼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등 중소 세력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흉노가 세력을 키우고 있을 쯤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혼란상태였다. 곧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완수한 한나라는 기나긴 내전을 거쳤지만 흉노라는 거대한 적을 다시 맞이해야만 했다. 한 고조 유방은 통일전쟁을 거치며 양적 질적으로 강대해진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200년 흉노를 공격한다. 그러나 고조가 본대와 떨어져 고립되면서 흉노에게 뇌물을 바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귀환한다. 평성지방에서의 이 사건을 ‘평성의 수치’라고 부른다.


평성의 수치 직후 한과 흉노는 화친이라는 이름아래 평화조약을 맺게되는데 사실상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물자와 공녀를 바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게 되었다.


이제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유목민을 통합하였고 장성 이남의 한나라 또한 굴복시켜 초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각종 사치품을 약탈이라는 수단 없이 입수할 수 있게되 었다.

흉노의 군주 선우는 서쪽은 알타이에서 동으로는 싱안링 산맥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한나라와의 화친에서 얻은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바탕으로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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