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의 시작과 청일전쟁
1.당시의 시대상
서양 열강의 출현으로 동아시아 지역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가운데 일본의 근대화 움직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이 미국에게 무력으로 개항해야 했던 그 절차 그대로 조선에게 무력시위를 벌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청이 경계할 만큼 교역 점유율을 높여 갔고 이에 대해 청은 조선에서 일어난 구식군인들의 난인 1882년 임오군란에 군대를 파견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청일 양국의 대립은 1884년 갑신정변 발발 이후 체결된 천진조약에 의해서 청의 우위로 일단락 되었다.
2. 일본의 약진
1890년대가 되면서 일본은 청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는 일본이 서양식 포술을 채택한지 50년 가까이 되었고 징병제를 실시한 1872년 이후로 20년 가까이 지났기에 상당한 군사적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헌법을 도입하며 ‘제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군사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군비확장책을 추진했다. 특히나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위해 군비를 확장했고 이 노력은 1890년에 일본의 대청 입장이 적극적으로 변하는 변동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890년대 부터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경계해온 영국으로 부터 우호적인 입장을 받았고 그 결과로 1894년 7월에는 영일항해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3. 청일전쟁
청일전쟁 이전부터 청과 일본은 교역부분에서 신경전이 있어왔다. 두 나라 모두 조선내 교역을 독점하길 원했고 자국의 점유율을 높이려 했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청일전쟁의 직접적 계기로 작동했다.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고 전주성이 점령당하면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천진조약에서의 동시 출병 조항을 근거로 내세우며 그 즉시 파병을 결정하였다. 천진 조약 이후 청보다 열세였던 조선내 영향력을 높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것이다. 그 배후에는 천진조약 이후 군비 확장책을 기반으로 키워온 일본의 군사적 자신감이 있었다.
일본은 파병 직후인 7월 23일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내각을 교체한다.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한다. 또한 8월 1일에는 청에 선전포고를 한 후 청일 전쟁을 시작한다.
1894년 7월 25일에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청과의 해전을 치루는데 청의 전함을 두척 격파한다.
이어 7월 29일에 아산에서 전투를 치루는데 이때 역시 청의 전함 두척을 격파한다.
이후 9월 15일에 평양에서 청 육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해서 조선에서 청군을 모두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평양 전투 이후 일본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게된다.
이후 2일 뒤인 9월 17일에는 황해해전에서 청 북양함대 상당수를 파괴하고 제해권을 장악한뒤 청의 영토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게 된다.
그해 11월 4일 청의 영토인 랴오둥 반도의 여순을 점령하고 이어 일주일 뒤에는 바다 건너 산둥반도의 대련을 점령한다. 산둥반도의 대련을 점령한 뒤 육군은 랴오둥반도를 점령하고 해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이듬해 2월 산둥반도의 위해위를 공격한다. 산둥반도의 위해위는 청 북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곳으로 군 생산시설을 습격당한 청 함대는 사실상 괴멸상태에 빠졌다. 전쟁이 일본의 압도적인 우위로 진행되자 청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강화를 모색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청일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강력해진 일본의 군사력에 다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4. 청일전쟁의 결과 - 시모노세키 조약
청은 일본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굴복해 강화를 맺고자 했고 일본도 이를 승락하여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측 대표 이토 히로부미와 청측 대표 북양대신 이홍장은 이날 강화조약에 서명하면서 청일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이른바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주 내용으로는 청이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청은 일본에게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열도의 할양, 거액의 배상금 지불등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이 그대로 이행된것은 아니다. 일본의 랴오뚱반도 할양 요청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청일전쟁 승리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간섭하여 무산되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만주를 통해서 대륙으로 진출 하려 했던 일본정부의 계획은 30년 이상 늦춰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종주권은 인정 받아 일본은 10월에 을미사변을 일으켜서 반일정권을 주도한 왕후를 살해하고 친일 정권을 세우면서 강력한 내정간섭을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의 적극적인 내정간섭책은 조선 고종의 아관파천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결국 조선에는 친러 정권이 세워졌다.
또한 일본은 대만의 영유권을 인정 받아 대만에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무력을 내세운 군정이었지만 1895년에 대만 총독부를 성치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며 식민 지배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때 쌓인 노하우는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에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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