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접근과 페리제독
18세기 말부터 일본 각지에 외국선이 빈번하게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막부는 심각한 도적에 직면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주로 러시아가 개항에 대한 압력을 시행하였는데 1778년 나타리아 호가 앗케시에 내항하고
1792년 락스만 사절이 네무로에 내항하였다. 곧이어 1804년 나가사키에 레자노프 사절이 내항하였다.
뒤이어 19세기에는 영구과 미국이 압박하였다. 외국선의 출몰이 빈번해지자 막부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1825년 막부는 연안에 접근하는 중국 이외 국적 선박은 모두 격회하는 이국선 격퇴령을 발령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열강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국선 격퇴령을 철회하고
이국선이 보급을 원할 경우 공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신수급여령이라고 한다.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자 사회적, 사상적으로 다양한 모색과 도전이 이루어졌는데 네덜란드인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의 과학기술을 탐구하는 난학이 유행하였다. 일본어로 (蘭学:난가쿠) 난가쿠로 불리우는 새로운 학문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의 나루타키주쿠와 오사카의 데키주쿠에 전국의 젊은이 들이 난학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막부도 난학자를 등용하여 양서를 번역하고 서구의 지식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섭취가 쇄국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판단되면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 1828년의 시볼트 사건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시볼트: 홋카이도 지도를 반출한 죄로 막부에 의해 국외 추방되었다.
독일출신인 시볼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와 생활하였는데 당대 일본의 물건들을 수집하여 네덜란드로 보냈다.
그러나 미리 물품을 실어 보낸 배가 조난을 당하면서 시볼트의 물건이 떠내려오게 되었는데 그 안에 홋카이도의 지도가 들어 있었다.
당시 막부는 일본지도의 국외 반출을 엄금하였는데 이를 어기게 되어 시볼트는 국외 추방령을 받게 되었다.
▲ 페리제독 원정
열강의 접근과 개항요구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막부에게 1853년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군함이 에도 앞 우라가 항에 나타났다.
페리제독은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통상을 요구하고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당시 막부의 중심지인 에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진행한겄이다. 페리는 이듬해 봄 재차 내항하겠다며 곧 일본을 떠났다.
에도의 막부도 이러한 일이 있을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열강이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앞서 서술하였듯 일본도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미국도 1844년 중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태평양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일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막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양이론과 현실론으로 나뉘어 고심하였으나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최혜국 조항이 들어간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이 한 짓을 고대로 조선에 써먹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다.
미일화친조약에 만족하지 못한 미국은 초대영사 타운젠드 해리스로 하여금 막부에 강하게 통상의 자유화를 요청하게된다.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안세이 5개국 조약)
이로서 일본은 서양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다.
에도에는 서양의 외교관들이 주재하고 개항장에는 무역과 문물교류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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