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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에도막부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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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18. 10. 2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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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막부의 대외관계


▲ 조선통신사 행렬도



1. 조선과의 대외관계

1600년에 새로이 에도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막부설립 이전인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교섭을 게시한다. 이에야쓰는 히데요시 와 달리 평화 외교를 표방하고 자유 통상 무역을 전개했다. 

우선 1598년 쓰시마섬의 소씨를 통해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한 교섭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결실로 1607년 조선의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이어서 1609년 기유조약을 맺어 외교관계와 무역을 정상화 하였다. 조선에서 인삼과 책등을 들여오고 은과 동, 유황을 수출하였다. 

기유약조로 인하여 부산에 왜관이 설립되고 쓰시마는 양국으로부터 외교와 무역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조선은 1811년까지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를 여덟차례나 파견했다. 이는 회답겸쇄환사가 포함되지 않은 수이며 이를 포함하면 총 12회이다. 

임진왜란으로 틀어진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에 중재를 요청하고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좌절되었다. 


▲ 류큐왕국의 슈리성


2. 류큐와의 대외관계

류큐왕국은 14609년에 사쓰마 번에 의해 공격당했고 점령당했다. 독립왕국이던 류큐는 완전히 일본에 흡수되지 않았고 1655년 청으로부터 책봉사를 받는다. 류큐를 두고 일본과 청 사이에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이후 류큐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의 지배(사쓰마 번)를 받으면서 청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보내는 이원외교를 펼쳤다. 류큐는 사쓰마 번에 매년 연하사를 보내고 쇼군 취임시에는 경하사를 파견했다. 1644년 이후 류큐에서 왕이 새로이 취임할때마다 막부에 사은사를 보냈다. 류큐는 사쓰마 번에 조공을 통해 또는 무역을 통해 얻은 중국산 특산물을 공납하였다. 

비록 양국에 지배, 종속적 관계였지만 류큐는 메이지 유신이 있는 19c 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3. 에조가시마와의 대외관계 

일본 북부에 있는 홋카이도 남부 지역인 에조가시마는 일본인과 아이누인이 함께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가키자키씨는 1593년 히데요시로부터 마쓰마에 선박세 징수권을 인정 받았다. 이후 가키자키씨는 1599년 마쓰마에 요시히로로 개명하고 1604년에 에도막부로부터 선박세 징수권과 아이누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 받았다. 

에조가시마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마쓰마에를 통해서 교역하였다. 

1669년에는 샤쿠샤인을 중심으로 아이누인 집단이 연합하여 봉기하였는데 막부는 주변의 쓰가루 번에 병력을 파견할 것을 명령하고  아키타 번, 난부 번 등에 출동대기상태를 내리는등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하여 1671년 샤쿠샤인의 난을 진압하였다. 난이 진압된 이후에 아이누 인들은 마쓰마에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


4. 유럽과의 대외관계

막부는 유럽과의 관계에서 무역과 기독교금지정책을 분리하여 댕으하고 있었고 1624년에 무역과 선교가 밀접히 결합되어 있던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1609년 영국과는 1613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했는데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1623년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했다. 1637년에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금지와 가혹한 세금에 반발하여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은 막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1638년에 진압되었다. 결과적으로 막부의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만 강화시켰다. 

1639년에는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겼다. 



데지마는 나가사키 앞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인공섬으로 이곳에 네덜란드 상관을 옮겼다. 네덜란드는 매년 은 55관을 내고 데지마를 임차하였다. 하나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었고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으나 뱃사람들을 대상으로하는 유흥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일부 상인들과 기녀들이 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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