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막부의 창시자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 - 가마쿠라 시대(일본어: 鎌倉時代, 1185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란 1180년대에 세이와 겐지의 후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수립한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이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의 조정이 공존한 1333년 까지의 약 150년간을 가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교토의 조정과 지방의 장원·공령은 그대로 두고 지방지배에 지토 등의 형태로 무사가 끼어드는 이원적인 지배구조가 형성되었다.
집권가문의 성은 미나모토였으나 3대로 그치고 이후 호조씨가 가마쿠라 막부를 이끈다.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를 종종 쇼군의 성씨에 따른 아시카가 막부,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를 미나모토 막부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헤이시의 전횡이 심화되자 1180년 모치히토왕이 헤이시 타도를 외치며 교토에서 거병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무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역시 모치히토 왕의 밀령을 받고 거병했다. 요리 토모는 자신의 가문을 따랐던 동국지역 무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가마쿠라에 들어갔다. 현재 일본의 가나가와현 미우라 반도에 위치하는 가마쿠라는 도카이도의 요충지로서, 남쪽이 바다에 면하고 3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군사의 요지였다. 헤이시는 가마쿠라로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후지가와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결국 헤이시는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1185년 3월에 멸망한다.
이 동란의 배후에는 광범위한 지방영주층이 있었다. 요리모토는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이 적군의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상으로 지급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내란 시기 내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요리토모는 헤이시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간토지역에서 나오지 않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 힘썼다. 그가 근거지로 택한 가마쿠라는 천혜의 요충지로서 1180년 12월 동국 지역의 무사 311인이 모여 요리토모를 가마쿠라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요리토모는 1181년부터 조정과의 교섭을 개시하여 1183년에는 동국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나마 승인하는 조정의 선지를 얻어냈다. 따라서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189년 가마쿠라의 군사정권은 동북부의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키고 일본 전역에 미치는 군사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를 오슈정벌이라 한다.
내란을 종식시킨 요리모토는 1192년 세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 ‘쇼군’은 원래 헤이안 시대에 동쪽지역 에미시 정벌을 위해 파견된 장군의 명칭이었는데, 요리토모가 덴노로부터 이 직책을 받으면서부터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그 이전의 무가정권인 헤이시 정권과의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몬추쇼(問注所)라는 소송 접수 기관을 설치하여 지금까지의 지쇼의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 당사자간의 무력투쟁으로 쉽게 발전하던 것을 이로써 실질적으로 금지하게 되었다. 즉 전국각지에서 벌어진 무사 간의 소란은 대부분의 원인이 토지지배에 관련된 것으로 요리토모의 새로운 정치이론은 이후 바쿠한 체제의 근간을 이룩하게 되었다.
요리토모 사후, 3대 쇼군 미나모토 사네토모를 끝으로 요리토모의 혈통이 단절되었으나 쇼군의 보필제도로서 호조 가문에 의한 섭정제도(싯켄)가 창설되어 가마쿠라 막부제체는 계속되었으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라는 최초의 무가법이 제정되어 이후의 중세사회의 기본법전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영주인 무사의 토지소유제도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개간이 진행되어, 실질강건의 가마쿠라 문화가 꽃피었다. 문화예술적으로도 이와 같은 사회정세를 반영하여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 지금까지의 구게(公家)사회문화와는 다르게 불교와 미술도 무사와 서민이 알기 쉬운 새로운 것이 인기를 끌었다. 정국의 안정은 서일본을 중심으로 상품경제의 확대를 가져와 각지에 정기적인 시장이 서게 되었다.
13세기에는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침략이 있었으나(1274년과 1281년), 두 번 다 태풍으로 원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하여 실질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은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나고 후세의 역사의식에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략에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지금까지의 국내의 전쟁과는 달리 외국과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전쟁준비를 위해 출정한 무사들에게 주어진 은상이 적었기 때문에 막부와 무사들간의 신뢰 관계를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원의 침략을 기회로 막부는 무사가 아닌 자를 포함한 일본전국의 무사에의 군사 동원을 내리는 권한을 얻은 것 외에, 진제이 단다이와 나가토 단다이(長門探題)와 같은 기관을 두어 서쪽 지방으로의 지배를 강화했다. 하지만 서쪽 지방을 시작으로 일본국내를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하려고 하는 호조 씨의 가문인 도쿠소가(得宗家)는 무사들을 배제하고 피관(被官)인 미우치비토(御内人)를 중용하게 되고, 이에 고케닌의 마음은 점점 막부에서 멀어지게 되어, 무사전체의 불만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후에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죠큐의 난 이후의 조정의 쇠퇴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자체 해결능력도 잃어버려 결과적으로 막부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막부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막부는 양통질립 원칙에 따라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와 지묘인 계통(持明院統) 양 황통간에 걸친 교섭에 의한 황위 계승을 권하여 깊이 관여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분규의 장기화에 의해 조정에서 막부에게 새로운 개입 요청을 하게 되고, 그 막부의 개입 결과에 불만을 품는 반대파에 의해 개입 요청이 더욱 늘어나게 되어 막부의 방침과 상반된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다이가쿠지 계통 출신의 고다이고 덴노의 자손으로의 덴노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을 때, 이에 반발한 고다이고 덴노이 자신을 지지하는 고케닌과 막부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의 연계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쿠데타를 일으켜 막부 타도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겐무 신정).
무사계급이 일본 덴노, 귀족계급과 분리된 새로운 지배체제로 봉건정치의 시작을 의미한다. 봉건정치는 그 후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는 1868년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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