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794~1185/1192)
헤이안 시대(일본어: 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 794년~1185년)는 794년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그 기간은 간무 덴노가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했던 794년부터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1185년 혹은 고토바 덴노에게 정이대장군(쇼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라 시대에 율령정치가 시작되어 헤이안 초기에는 덴노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시기까지 700년동안 이어졌다.
헤이안 전기(前期)는 전 시대(나라 시대)부터의 중앙집권적인 율령정치를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다. 하지만, 율령제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9세기말 ~ 10세기초에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의 기본이었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지배체제로 크게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 방침의 전환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를 현지에 부임하는 필두 고쿠시(國司:수령(受領))가 총괄하게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 체제하에서는 국가에서 토지경영이나 백성을 지배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유력한 백성(다토(田堵), 묘슈(名主))층의 성장이 나타나며, 그들의 통제하기 위한 이 권력위임과 병행하여,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 층도 또한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국가권한의 위임과 이에 의한 중앙집권의 지나친 부담의 경감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 가업을 담당하는 가계에 세습되는 현상이 진행되어 귀족의 최상위에서는 셋칸케(摂関家)가 확립되었고, 중류귀족에 고정된 계층은 중앙에서는 가업의 전문기능 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는 수령이 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다(헤이안 귀족). 이 시기는 셋칸케에 의한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고, 특정 권문(権門)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얻는 장원(荘園)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하여 수령이 징세권을 담당하는 공령(公領)과 함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
11세기 후반부터는 태상덴노(太上天皇)이 지텐노키미(治天の君)가 되어 정무를 돌보는 인세이(院政)가 시작되었다. 인세이의 시작이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인세이 시기에는 장원의 일원영역적(一円領域的)인 집적과 고쿠가료(国衙領)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고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되어, 이에 동원된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는 중에 최초의 무가정권(武家政権)인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을 혼자 도맡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확대된 내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다이라씨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정부인 조정과는 별개로 내란을 수습하여 도호쿠의 지배권을 얻은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하여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외교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 마침내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 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황금을 바쳤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전인수라는 주장도 있다.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상인과 중국 상인에 의한 민간 무역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장보고가 크게 활약하였다. 일본사서인 <속일본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명 천황, 승화8년(AD 841년) 2월 태정관이 다자이후에 명을 내려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에 말 안장등을 바쳤는데, 장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하로 감히 공물을 바치니 옛 규범을 상고해 보면 정당한 물건이 아니다. 마땅히 예로써 거절하여 조속히 물리쳐 돌려 보내도록 하라.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은 임의로 민간에 맡겨 교역할 수 있게 하라.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물건을 구매하는 값을 어기고 앞다투어 가산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라.
또한 후하게 도와서 돌아가는 길의 식량을 지급하되 전례에 따라서 하라”라고 말했다.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직교역인 조공무역이 침체된 시기에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면서
당 - 신라 - 일본을 잇는 대외 교역망을 구축하였고 그래서 일본으로서는 원하는 물품을 얻는 창구로서 장보고에 크게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장보고는 당의 물품뿐 아니라 서역의 물품을 일본으로 들여와 일본에서는 이들 상품에해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시 신분제를 엄격히 지키던 일본으로서는 장보고 일행의 물건으로 인해 가격 폭등이나 신분 질서의 동요등의 사회문제 가 일어나 그 대책을 고심할 정도였다.
당이 쇠퇴기에 들어 실크로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육로 교역보다는 바닷길의 교역이 활발해졌는데 청해진의 교역선은 중국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물건을 구입했고 청해진으로 돌아와 그 일부를 일본으로 보냈다.
사무역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하지만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926년 발해가 멸망했으며 935년에는 통일신라마저도 멸망했다. 귀족 중심의 사회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고 무역을 중단하게 되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은 완전히 고립되기에 이른다. 당시 동아시아의 권력 교체기로서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종교
앞선 나라시대에 불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속세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불교가 권력화, 세속화 되었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사이초나 구카이같은 이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불교는 이제 심오한 철학 체계를 갖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일본사에서는 이 시기 불교계의 이런 새로운 경향을 [헤이안 신불교]라고 칭하고 있다.
사이초
사이초는 804년 당나라에서 천태종을 배운뒤 귀국하여 연력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열었다.이후 연력사는 일본 불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일본 불교의 기초를 닦은 이들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왔다. 천태종은 본디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적 종파이기에 신도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의 주술적인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쵸는 천태종을 배웠음에도 신도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둘을 결합하였다. 일본 불교의 특징인 신불습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구카이
한편 밀교는 구카이에 의해 발달하게 되었다. 구카이는 처음에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유,불,도 3개 종교 중 불교의 우위를 논한 삼교지귀를 저술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사이초와 함계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 장안으로 가서 청룡사에서 혜과로부터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금강봉사를 짓고 진언종을 열었다. 진언종에서는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고 천명하고 즉신성불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밀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경전을 통해 배워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현교와는 달리 술법의 전수 , 습득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여 주술성이 강한 종교인 신도에 익숙해 있는 일본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현세에서의 구복과 구제를 목적으로 주문을 외며 기도하는 밀교의 가지기도는 황실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이후 밀교는 번성하여 천태종 쪽에서도 사이초 이후 당나라로 건너가 새로이 밀교를 배운 엔닌, 엔친,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밀교를 받아들여 진언종의 밀교를 동밀이라고 부르고 천태종의 밀교를 태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화
헤이안쿄로 천도한 후 9세기 말까지의 문화를 사가덴노 세이와 덴노 시대의 원호를 따 고닌, 죠간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에는 한문학과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당풍(唐風) 문화가 발달 하였다. 사가 덴노는 당나라의 문화를 중시하여 일본 고유의 풍습에 당풍의 의례를 도입하여 여러 궁정 의식을 정비 확립하였는데, 이때 내리식이 만들어져서 이후의 의식서로 전해졌다.
또한 문장으로 나라를 경영한다는 의미의 문장경국 사상에 기초하여 문인, 학자들이 대거 등용 되었으며 궁정에서도 한시문을 읊는 연회가 여러차례 개최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귀족의 교양으로 한시문을 짓는 것은 중시되었고 나라 시대에도 회풍조가 편찬되었지만 당나라의 한시를 흉내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한시문을 자신의 것으로 습득한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고 문화수려집, 경국집 등의 한시문집이 차례로 편찬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일본 문학사에서는 이를 국풍암흑시대라고 칭한다.
실생사 5층탑
천태종, 진언종 양종의 발전과 더불어 신비한 밀교예술이 발달하였다. 건축에서는 사원이 산간에 세워지게 되어 그 지형에 맞추어 이전의 가람 배치와는 다른 밀교 사원이 만들어졌고 노송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지붕도 만들어졌다. 실생사의 금당이나 오층탑은 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회화나 조각에서도 불교 예술이 발달하였다. 만다라가 특히 발달하였는데 만다라는 밀교에서 중시하는 대일여래의 지덕을 표현한 금강계와 자비를 표현한 태장계의 불교세계를 질서정연한 구도로 도식화 한 것이다.
태장계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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