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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나폴레옹 몰락과 빈 체제, 러시아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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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7. 1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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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나폴레옹 몰락과 빈 체제, 러시아의 대외정책

러시아군의 파리입성 (1814)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국경을 넘어 프랑스군을 추격하며 전쟁을 이어나갔다. 이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영국, 스웨덴 측으로 돌아섰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연합군은 1813년 10월 16일 부터 19일까지 라이프치히 대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승리를 발판으로 연합군은 라인강을 건너서 프랑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

군사의 천재 나폴레옹이 분전하기는 했으나 연합군은 결국 1814년 3월 31일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하였다. 알렉산드르는 훗날 이날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1815년 3월 1일 돌아와서 프랑스 왕위를 되찾고 3개월간 군림하였다. 그러나 워털루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그의 신화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였다.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정의했던 빈 회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인상적인 외교 모임중 하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를 대표하면서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과 함께 회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빈에 모인 각국의 대표자들은 유럽의 정치지도를 다시 그렸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지도를 재편성 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면서 안정을 기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빈 회의

빈 회의에서 러시아의 야망은 폴란드에 집중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와 직접 연합된 커다란 폴란드 왕국을 수립하고 그 왕국에서 자신이 왕이 되기를 원했다. 알렉산드르는 폴란드 분할이 부당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무효로 만들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위해서는 폴란드 왕국을 수립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작센 전체를 프로이센이 통치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의 탈레랑은 이를 이용해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프랑스가 외교무대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유럽을 나폴레옹으로부터 해방시킨 자들이라 믿는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폴란드 입헌왕국, 차후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흡수된다.

결국 러시아는 폴란드 왕국을 획득했으나 그 크기는 축소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작센의 60%를 얻었다. 여기에는 폴란드 북서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의 황제, 입헌주의적 핀란드의 대공, 입헌주의적 폴란드의 왕이라는 여러 직책을 겸했다. 

알렉산드르가 외국의 문제에 몰두하는 동안 러시아의 국내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러시아의 통치 후반기는 진보적인 입법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알렉산드르 통치 후반부의 조력자인 아락체예프는 전쟁장관이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수상이 되어 알렉산드르의 명령을 아무런 의심없이 수행했다. 통치 말년에 들어 알렉산드르는 러시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여행중 목격한 러시아의 후진성과 고통을 보고 슬퍼했으며 1824년 거대항 홍수로 고통받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며 마차에서 뛰쳐나와 울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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