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조선의 영토 개척, 4군 6진과 쓰시마 정벌
조선은 건국후 국경선을 확보하고 농경지를 개간하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국경선이 강을 할때 외적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의 경계로 삼고자 북진해 근거지를 조성한 것이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말에 여진족을 평정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태종 대에는 여진이 계속해서 침입해 일부 후퇴했지만 세종 대에 들어 다시 되찾았다. 세종 16년인 1434부터 10년에 걸쳐서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경원, 종성, 회령, 경흥, 온성, 부령 등에 6진을 설치했다.
압록강 상류지역은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여진족이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여진족이 활동하며 조선의 변경을 침입하자 세종은 이곳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등 4군을 설치했다. 이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교통에 불편하자 폐지론이 대두되어 세조 대에 실제 2번에 걸쳐 폐지되기도 했으나 결국은 사민정책에 의해 농사를 짓는 땅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의 북방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땅을 확보한 뒤 진을 설치해 수비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하면서 땅을 점령해 나갔다. 사람이 살아야만 토착민이 자신의 지역을 방어할 수 있기에 적극적으로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세종 대에는 6진 개척을 위해 함경도 내에서 5518호를, 하삼도에서 유리하던 유리민 1122호를 옮겨 살게 했고, 4군에는 평안도 1925호, 하삼도 민호 3000여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북방으로 옮긴 하삼도 출신의 백성은 5000호가 넘었다.
또한 세종은 왜구의 본거지 이던 쓰시마를 정벌해 남쪽 변안을 편케하였다. 1419년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를 공격하였는데, 전함 227척을 동원한 대규모 정벌군이었다. 선발대와 본대는 하루 뒤에 쓰시마의 천모만으로 진입하여 전투를 벌였고 적선 백여책을 태우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뒤이어 6월 26일 쓰시마 도주의 항복으로 조선군은 철수한다. 약 2주간의 쓰시마 정벌로 남해안의 왜구는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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