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추진하고 고려사회를 개혁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엇던 것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국방이 어지러워지자 내부에서의 개혁정책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에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일아난 한족 반란군이다. 이들의 일부가 만주지역으로 북진하였으나 원의 반격으로 쫓기게 되자,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들어왔다. 1359년인 공민왕 8년 12월 홍건적의 장군 모거정은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의주, 정주, 인주, 철주등을 함락하고 서경인 평양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고려는 이듬해인 1360년에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이끄는 군대를 편성하여 서경을 공격하였다. 홍건적은 고려군을 맞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궤멸되어 다시 압록강을 건널때에는 300여명만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게 홍건적의 1차 침략이다.
홍건적의 2차 침략은 1361년에 일어났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역을 침범하다가 1361년 압록강이 얼자 10여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로 공격해왔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이방실과 안우등이 홍건적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홍건적에게 빼앗긴다. 1362년 고려군은 개경을 되찾기 위해 최영 등의 장군이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서 개경을 수복했다. 당시 이성계는 휘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홍건적은 대패하여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모두 궤멸되었다.
고려를 괴롭혔던 왜구의 경우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 부터이다. 이후에 공민왕과 우왕대에 이르러서 왜구의 침략이 급증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왜구들은 약탈과 방화, 살인을 일삼았고 약탈의 대상은 주로 곡식이었다. 왜구들은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과 창고인 조창을 공격해서 공격했다. 이렇게 되자 고려는 세금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고,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왜구의 침입은 주로 충청과 전라, 경상도에 집중되었지만 그곳에 그치지 않고 왜구는 조운선이 다니는 물길을 따라 개경 앞에도 진출하였다. 이들은 해변뿐 아니라 내륙까지 깊게 들어오는 일도 빈번하였다.
고려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적극적인 토벌에 나섰다. 최영이 1376년 충청도 홍산에서 왜구를 격퇴하면서 금강 연안의 내륙으로 진출하는 왜구를 막아내기도 했다. 중국 상인에게 화약제조를 배운 최무선을 통해 화통도감을 설치한 고려는 화포를 만들어 금강 입구인 진포에서 왜선 500척을 모두 불태우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때 남부 지역을 휩쓸고 다니던 왜구를 이성계와 변안열이 지리산 황산에서 크게 무찌르면서 왜구들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뒤이어 정지가 남해 관음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창왕 원년인 1389년에는 박위가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소탕하므로써 왜구의 고려침입은 잠잠해졌다.
수년에 걸친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사실상 황폐화 된 상황이었다. 원의 간섭과 국방의 혼란은 고려의 약화를 불러왔으며 더욱이 조운이 두절되면서 국가 재정까지 위협받았다. 특히 도서지방과 해안은 그 피해가 매우 커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변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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