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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남북조 시대: 북강남약의 시대 (31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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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1. 1. 9.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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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남북조 시대: 북강남약의 시대 (316~589)

서진의 멸망이후 강남으로 이주한 교민들에 의해 동진이 건립되었다. 동진 건립이후 남북 관계는 전쟁과 외교전으로 압축된다. 사마씨의 서진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한족들이 즐겨 사용하던 중화란 중국과 화하민족의 합성어인데 중원을 유목민족에게 내주게 된 한족들은 스스로 중화를 칭하기 어려워졌다. 이들은 강남에 동진을 세우고 중원을 회복하고자 북벌을 진행하였지만 북조의 강력한 군사력에 가로막혀 성과는 크지 않았다. 이른바 북강남약의 시대였다.

고대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농업사회였다. 이는 곧 인구의 많고 적음은 경제적 우열을 의미했다. 경제적 중심지인 화북을 가진 북조에 비해 남조의 인구는 매우 적었다. 위촉오 삼국을 포함한 위진남북조 시대 남방의 정권이 화북 정권과 대립적인 형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천과 강남 지역이 서로 연합하거나 통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삼국시대 촉과 오가 연합하여 위에 대항한것이 그 예시이다. 이렇게 강남이 통일되지 않으면 북조에 대항할 만한 인구와 경제력이 형성되지 않았다. 남조의 마지막 정권인 진나라가 사천을 북방정권에 빼앗기자 북조의 수나라에 그대로 흡수 된것 역시 이 점을 말해준다. 남조는 송, 제, 양, 진 정권을 거치면서 국경선이 황하에서 회수로, 다시 더 남쪽인 양쯔강으로 밀려가다가 진나라대에는 강역이 점점 좁아진다. 이는 남조가 북조에 경제력과 군사력에 밀려 국경선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보여준다. 

남북조시대의 병사

이러한 북강남약의 차이에는 군사력의 차이도 한몫하고 있다. 북조의 군사력은 기본적으로 기병으로 조직된 군사이다. 이는 유목민과 농경민족인 한족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북조의 기병은 치밀한 조직과 기동성을 활용한 전술을 이용하며 보병에 비해 넓은 범위를 빠르게 척후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이에 비해 남조의 보병은 이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남북간의 외교전도 치열하였다. 외교 사절 간의 정통성 논쟁도 전개되었다. 북위는 남조의 왕조를 섬오랑캐라 부르고 남조는 북위를 꼰 머리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하였다. 중화세계의 분열과 동요로 양측 사절은 현안 해결의 문제보다는 왕조의 정통성을 두고 벌이는 설전에 더 욱 신경을 썼으며 이는 곧 권력의 명분을 세우는 작업이기도 헀다. 

남조는 송, 제, 양, 진의 순서로 정권이 이어졌으며 북조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후 100년간 이어졌으나 동위와 서위로 나뉘어졌다. 이를 북제, 북주로 부르기도 한다.이후 북주가 북제를 통합하고 수가 북주를 계승하게 된다. 이 수가 남조까지 통일하고 통일 정권을 이루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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