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와 워싱턴체제
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이 중국내 영향력을 크게 늘린것에 대해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중국내 세력을 크게 확장한것이 열강들의 불만이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아시아내 시장을 개척하는것이 지상과제였는데 이를 신흥세력인 일본이 크게 잠식하자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이에따라 1921년 11월에서 1922년 2월까지 미국의 워싱턴에서 해군 군축 및 중국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제 회담이 개최되었다.
워싱턴 회의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공동협력을 약속하는 4개국 조약과 중국의 영토와 주권존중 및 문호 개방을 골자로 하는 9개국 조항이 체결되었다. 이 회의에서 수립된 1920년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기본체제를 ‘워싱턴 체제’라고 부른다.
워싱턴 체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지도자격으로 성장한 영국과 미국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편성되었따. 따라서 일본정부는 국제질서의 현실에 따라 워신턴 회의에서 군축과 중국정부의 주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협조 외교 원칙을 채택했다. 비록 일본의 이권을 조금 빼앗기고 해군력과 육군 감축에 있어서도 일본에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이를 묵살하고 국제질서에 불응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리하여 일본은 해군과 육군을 감축하고 시베리아에 주둔중인 군을 철병하였다. 뒤이어 산둥반도 또한 반환하여 1922년 중국과 시베리아로 뻗어나가려던 일본제국군은 다시 움츠러들게 된다.
1920년 대 일본의 외교는 협조외교를 기본 골자로 하여 타국에 협력적 자세를 취했지만 중국과 중국시장에 관한 문제가 얽혀있는 이상 중국은 여전히 일본에게 중대한 현안이었다. 일본 정부는 중국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내정불간섭 원칙을 표방하면서 지방 군벌 정부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교역의 우위나 일본의 국익을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 장작림[張作霖: 장작림 - (1873.3.19 ~ 1928.06.04) ]
그러나 1926년 7월에 국민혁명군이 반외세, 반군벌의 기치를 내세우고 북벌을 단행하면서 일본이 가지고있던 중국내 영향력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북벌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있던 1927년 3월 국민혁명군이 남경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 총영사관이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는 중국 혁명에 대해 무력 개입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의 일본 내각인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적극적인 대륙 정책을 표방하였는데 총영사관 공격사건을 트리거로 장개석의 북벌에 대응해 산동으로 출병하였다. 1928년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개석에 접근하는것을 막기위해 관동군을 움직여서 철도 폭파사고를 위장한 장작림 암살을 실행했다. 그러나 국내외로 강한 비판을 받으며 폭파사고를 통한 만주 출병은 실패로 돌아간다.
일본은 이후 혐조 외교체제를 기본 골자로 하고자하나 193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해군군축조약에 참가하기도 하고 중국문제를 둘러싼 국내외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군부를 중심으로하는 국내의 강경론자들에게 계속되는 지탄을 받았다. 강경론자들은 일본의 외교를 ‘연약외교’라고 부르며 강력히 비판했다.
1920년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던 일본의 협조외교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되자 30년대 들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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