沃沮(東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相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 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 >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오천이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 각각에 '장사'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초에 '연'의 망명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와 '맥'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夷狄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히려, '불내'와 '예후'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다. 이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인 것이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다시 대인들을 사자로 삼았는데, 사는 주인인 것이다. 또한 대가들이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食飮居處, 衣服禮節, 有似<句麗>.{《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一]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 ,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그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에 여자는 십세가 되면, 이미 허락을 한다. 사위되는 집에서 이를 맞이하여,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相婁>接. <相婁>喜乘船寇 ,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출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원문과 번역|작성자 an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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