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와 ‘대동아 공영권'
1940년 이후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940년 7월 마쓰오카 요스케가 2차 고노에 내각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직후 사용한 단어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표현은 ‘대동아의 신질서’ 였다. 이는 기본 국책 요강에서 나왔다. 동북아시아 중심의 ‘동아 신질서’에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포함하여 일본의 지배권을 포괄하는 단어 였다.
1940년 4월 이후 독일이 서부 전선에서 전격전을 이용한 연전연승을 거두자 이에 고무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하면서 추축국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만주국 문제로 국제연합에서 탈퇴한 후 국제적 고립에 놓여있던 일본은 동남아시아로의 남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이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열강 대부분은 유럽에서의 전쟁에 신경을 쓰느라 아시아 지역은 크게 생각하지도 못했기에
일본은 이틈을 노려 남진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1940년 9월 일본의 군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인 ‘원장’ 루트를 차단한다는 명분아래 베트남 북부에 무력 주둔하였다.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체결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른다.
이로써 일본은 개항이래 기본적 동맹이었던 미국, 영국과 결별하게 된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공에 반발한 미국은 가솔린과 고철의 대일 수출을 금지시켰다. 가솔린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했던 일본은 급히 외교 교석ㅂ을 병행했지만 1941년 7월 일본군이 베트남 남부 진주를 강행하자 영국 미국 네덜란드 3국은 일본의 재외 자산의 전면동결과 대일 석유수출 전면 금지라는 조치로 맞섰다.
미국과 열강의 경제 제제에 다시 군부는 강경론을 들고나와서 전쟁 불사의 분위기가 짙어졌다.
1941년 고노에 내각에서 주전파인 도조 히데키 내각이 성립하면서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11월 일왕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12월에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만주사변 이전의 상태로 복귀를 요구하는 미국의 요청을 받자 12월 8일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군부의 독단 또는 일부 지도자의 독단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면 태평양전쟁은 어전회의를 통한 정식 루트를 통해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들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진주만을 공격한다. 당시 주말이었던 진주만은 일본군의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정박중이던 대부분의 전함을 잃었다. 미국 내부의 여론은 급격하게 강경론으로 돌아서 미국은 세계 제 2차대전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후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이 있고 2일 후에는 말레이 해전을 치루고 이어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를 무력으로 점령한다. 진주만 공격에 성공한 이후 일본군은 반년 사이에 과달카날에서 버마, 알류산 열도의 애투섬까지 공격하고 자바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 대부분의 영토를 공격하는것 까지는 좋았으나 전선이 넓어져 버린것은 큰 실수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 네척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일본은 태평양 방면에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잃기 시작한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으면서 전선으로의 보급이 어려워지고 원료의 이동도 어려워졌다. 44년 후반이 되면 공업원료의 수입이 어려워지게되고 석유 또한 수입이 곤란해졌다. 공습의 피해로 인한 손실누적과 청년 노동력의 부족, 이에따른 인플레이션 진행은 일본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노동력과 비료 생산량이 타격을 입으면서 농업 생산이 정체되어 심각한 식량부족에 처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과 만주에서 식량을 공출해 오고 강제로 물자를 공출 했으나 이를 타개하지 못했다. 일본은 당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에서 강제 징용, 더 나아가 지배의 대상인 조선인들에게 까지 총을 쥐여주는 강제 징병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이것이 승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조선인이 약 21만, 대만인이 2만명 징병되었으며 조선인 70만명과 중국인 4만명을 강제로 징용하여 사할린과 본토등에서 혹사시켰다. 이후 연합군의 공격으로 애투 섬을 점령당하고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이듬해 44년 7월 7일 유황도와 사이판섬을 동시에 빼앗겼다. 이어서 필리핀의 레이테 섬을 44년 10월 빼앗기고 이듬해인 45년 7월에는 오키나와 까지 점령당한다. 오키나와를 점령당하면서 사실상 전쟁은 일본의 패배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키나와에서 폭격기를 출진시키면 일본의 본토까지 타격이 가능했기에 일본은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사항전을 내세웠다. 버마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 괴뢰정권을 세우고 1943년 아시아 친일 정권의 대표를 소집해서 대동아 회의를 개최하는등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지만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했다.
아시아 각지에서는 항일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고 1945년 8월 6일 9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내세우며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던 일제의 태평양 전쟁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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