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러시아사] - 러시아 니콜라이 1세와 크림전쟁

TimeMap Project

by 에이구몬 2022. 8. 6. 22:40

본문

반응형

[러시아사] - 러시아 니콜라이 1세와 크림전쟁

앙리 펠릭스 필리포토, 세바스토폴의 펠리시에 장군과 그의 부관(General Pelissier and his Staff at Sebastopol) 1854~1855년

러시아는 1848년 이후 유럽대륙의 봉기를 진압하러 다니면서 보수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겉보기에는 러시아가 무적인것 처럼 보였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행태에 수많은 동맹국들과 유럽 대륙에는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노골적인 반러시아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이러던 중 근동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내 기독교 성지에 있는 기독교도의 권리에 대한 사항으로 인해서 벌어진 논란이었다. 성지에서 가톨릭 교도들과 정교회 교도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논란은 곧 가톨릭 교도 국가와 정교회 교도 국가 사이의 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다. 가톨릭 교도의 국가는 프랑스였고, 정교회 국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서로간의 반박은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러시아는 투르크인들에게 최후통첩을 날리면서 1853년 2월 멘시코프를 파견하였다. 러시아의 논리에 따르면 투르크 정부는 제국 내 수많은 그리스 정교인들에게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투르크는 이미 투르크에 속한 정교도 신민에 대한 간섭은 주권 침해로 인식하며 간섭을 용인하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러시아의 멘시코프는 회담을 포기하고 투르크를 떠났다. 게다가 러시아는 다뉴브 유역의 공국을 점령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데 핵심적 이유가 되었다. 

1853년 10월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인들은 투르크 함대와 수송선을 11월 30일 시노페 바깥에서 격침시켰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의 이유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1854년 3월 갈리폴리에 병력을 보내어 크림전쟁에 참여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기 직전에 멈추었으나 동맹국들 편에서 외교적인 압력을 강하게 행사했다. 니콜라이는 어느샌가 자신이 혼자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반대편에는 유럽 전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크림전쟁 전쟁사진

영국과 프랑스, 투르크, 그리고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는 흑해에 있는 러시아 요새 세바스토폴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854년 9월 동맹국은 크림 반도에 상륙해서 요새의 남쪽에서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제국은 발라클라바 전투를 통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격퇴당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러시아의 두번째 반격은 오르만 퍄사의 오스만군에게 격퇴 되었다. 크림반도에서의 전투는 세바스토폴 요새 포위전으로 바뀌었고 양측 군대는 끔찍한 전투를 이어 나갔다. 세바스토폴은 동맹국이 거듭 감행하는 포격과 돌격에 대항해서 11개월 반을 버텨냈다. 러시아의 보급은 단절되고 지휘부는 별다른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한 상황에서 나히모프 제독과 코르닐로프 제독과 같은 헌신적인 장교들과 흑해 함대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특히 러시아 공병대장이자 대령인 토틀레벤 백작은 방어진지 구축에 대한 대가로 동맹국의 진격을 훌륭히 지연시켰다. 이 이야기들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크림전쟁

그러나 세바스토폴은 보급이 끊긴채 항전하다 11개월만에 결국 수성을 포기했다. 러시아군은 남은 군함을 침몰시키고 요새를 폭파시킨 다음 1855년 9월 11월 세바스토폴을 포기했다. 이 시점에서 니콜라이 1세는 3월에 이미 사망했고,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와 동맹국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외교적 지원을 받아 1856년 강화를 체결할 준비를 마쳤다. 길어지는 전쟁에 영국과 프랑스도 이를 환영했다.

파리조약 (1856)

프랑스 파리에서 1856년 2월 부터 3월 하순 까지 한달간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조약의 규정에 의해서 러시아는 투르크에 다뉴브 강 입구와 베사라비아 일부를 양도해야했고, 흑해의 중립화에 동의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흑해에서 적대적 행동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다뉴브 강에 위치한 공국들은 러시아가 아닌 조약에 서명한 열강의 보호아래 놓이게 되었고, 러시아의 국가적 위상은 충격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이 사랑했던 러사이 제국군이 서구의 근대적 군대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1855년 2월 18일 사망했다. 군사 역사학자 풀러는 “크림전쟁은 전제정치를 정당화하는 원칙 중에 하나, 군사력과 안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전제정치의 능력을 폭파했다.”라고 서술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